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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을 재평가하다

일제강점기-한민족 독립운동사

by 느낌 . 2015. 9. 16.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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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 단체 기념 사진

오늘날(現 2015) 올해로 일제(日帝)로부터 해방으로 되어 8.15 광복(光復)을 맞은지 70주년이다.  광복절을 맞이하기까지 우리 선조(先祖)들은 일제강점기 때에 여러 분야에서 역할을 맡으며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대한독립을 위해서 노력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해서 본인은 그들에 대해서 뜻깊게 재평가 하려 한다. 일단 파벌로 나누어 알아보자. 사실 한반도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監視)와 탄압(彈壓)이 그 어느 곳보다 심했기에 무장투쟁은 쉽지가 않았다. 다만 "신간회"(新幹會)나 "신민회"(新民會)와 같은 모임으로서 민족 교육과 계몽(啓蒙)운동의 일환(一環)으로 학교를 세우고 강연회를 열었으며 "독립신문"이나 "횡성신문" 등을 발간(發刊) 하였다. 그 와중에서 국내에서의 무장투쟁이 전혀 없었던것은 아니다. 이북 넘어 만주 연변 지역(지금의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중국 영토)에서 뿌리를 내리고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하에 결성되어 영향권을 형성하던 독립군들이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국내에 침투하였으며 친일파(親日派)를 숙청(肅淸)하고 일제의 주요 고위급 인사들을 제거했으며 일제 주요 기관 건물 폭격 등의 활동을 했다. 독립군의 활동 영역 역활은 크게 3가지 분야로 나누어 분류할 수 있다. 첫번째로 지도부 격인 "임시정부"활동, 두번째로 "독립군 교육 양성",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외국 세력과의 공조(共助) 및 외교(外交)활동 등이다. 여기서 첫번째 "임시정부"의 활동의 경우,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서 중국의 도시인 상해(상해, 上海, 상하이) 등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중국 내의 여러 도시를 본거지로 삼아 옮겨 다니며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을 하였다. 먹는것 입는것 마저도 부족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백범 김구" 선생과 "이시영"선생을 예로 들 수 있다. "지도부"인만큼 "임시 정부"는 독립군들의 활동에 대해서 "임무 수행 지시"와 "독립운동 자금 조달"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앞서 밝힌 세번째의 경우와 같은 외국과의 외교 관계 활동에도 가담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고종 황제의 지시에 따라서 유럽의 "네덜란드"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의 인물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이승만", "안창호", "서재필" 등의 인물들이 당시 미국에서 미국 정부와 외교 관계를 맺는데 노력하였다. 이를 계기로 말미암아 "우남 이승만"은 "미군정"(美軍政)의 지원하에 우리나라 남한 초대 대통령이 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두번째 독립군의 교육 및 군대 양성은 일본군과의 무장투쟁으로서 활동 분야가 매우 넓고 방대하다. 주요 요점만 꼽아서 말하자면 나중에는 3개의 파벌의 군벌 형태에서 광복군(光復軍)이라는 이름의 형태로 합쳐져 재편되었다. 당시 중국 지도부는 "장제스"(蔣介石, 장개석)가 이끈 "국민당" 군벌과 "공산당"(共産黨) 군벌(軍閥)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들과 협약(協約)을 맺고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들은 일본군(日本軍)과 맞서서 무장 투쟁을 했다. 공산당 군벌과 협약을 맺고 무장투쟁을 하던 "사회주의"(社會主義) 사상 계열의 독립군은 8.15 해방 이후, 지금의 한반도 북한 지방에 주둔(駐屯)하였다. 이후 북한은 "김일성"이라는 인물을 현재 대통령 격인 원수(元首)로 내세우고 그의 지도하에 당시에 단독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웠다. 그 이후 북한이 6.25 한국전쟁을 일으켰을때 전세가 불리해지자 당시의 중국 정부는 미연합군의 북상에 대해서 국제 정치적인 위협을 느꼈고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오랫동안 혈맹(血盟)으로서 친교(親交)를 맺어왔던 "북한"과의 역사적인 관계를 외면할 수 없어서 당시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주석의 지도하에 있던 중공군(中共軍)을 한반도에 보냈다. 후대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 중에서 "이회영"이라는 이름의 독립군 인물이 있다. 그는 당시 소련(소비에트 연방, 현재의 러시아) 관계자와 친분을 맺고 있었으며 "무정부주의" 이념을 가지고 무장투쟁을 하였다. "이회영"이라는 인물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Anarchists) 크로포트킨(Pyotr Alekseevich Kropotkin)에 영향을 받아서 "아나키즘"을 지향하였다. 그의 이런 사상 때문인지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와 협조하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후손들의 일부가 지금의 "고려인'이라고 이름으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의 유라시아 대륙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고려인"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집단적으로 살게 된 이유는 당시 러시아의 지도자인 "스탈린"(Joseph Stalin)의 이민족 집단 강제 이주 정책의 영향이 컸다. 안타깝게도 8.15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서 정치적인 활동을 했거나 그저 머물렀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남한에서 "독립군 영웅 자격"을 받지 못하는 인물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북한 인민군 자격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독립군 출신의 조선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국민적인 영웅으로서 오늘날에 적절하게 재평가를 받아야한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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