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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무사 집단 풍류 화랑

남북국시대 신라-발해시대

by 느낌 . 2016. 12. 28.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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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 기원전 57년~서기 935년)는 건국 초기(建國初期)부터 격변(激變)의 삼국시대(三國時代)에 가장 힘이ㅠ없는 국가로 밀려나 있었다. 세력(勢力)도 영향력도 약한 편이었다. 영토는 수도였던 "서라벌"(지금의 경주)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북도를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의 함안, 김해, 고령, 성주, 함안, 창원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가야(加耶, 기원전 1세기부터~서기 6세기 중엽) 6개 소국은 신라 진평왕 때 신라에 병합(倂合)되었다고 한다.의 대표적인 무사 집단의 단체 이름이다. "화랑도"는 화랑"이 지켜야하는 정신을 이르는 말이다. 금관국(금관가야)의 핏줄인 "김유신"(金庾信)은 신라의 대표적인 화랑 출신이다. 화랑(花郞)은 신라전을 참고하여 말하자면 화랑도(花郞道)는 유불선(儒佛仙)과 삼덕(三德), 오계(五戒)를 도리로 여겼다고 한다. 여기서 유불선(儒佛仙)은 "유교"(儒敎)와 "불교"(佛敎), "선교"(仙敎)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를 내리고있다. 여기서 "유교"(儒敎)는 쉽게 말해서 중국에서 성인(聖人)으로 추앙(推仰)받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등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불교"(佛敎)는 부처님(釋迦牟尼)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이며, "선교"(仙敎)는 신선이 되기 위한 도(道)를 닦는 종교를 말이다. 나머지는 정리해서 말하자면 "세속오계"(世俗五戒)라고 부른다. "세속오계"는 계율(戒律)로 신라 진평왕 때에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정한것으로 불교적 성향이 있다. 다섯.가지로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이 있다."사군이충"(事君以忠)은 국왕(國王)에게 충성(忠誠)함을 이르는 말이고 "사친이효"(事親以孝)는 부모님께 효도함을 이르는 말이며 "교우이신"(交友以信)은 친구를 믿음으로서 사귈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임전무퇴"(臨戰無退)는 전쟁(戰爭)에서는 물러서지 않으며 "살생유택"(殺生有擇)은 사물(事物)을 죽이고 살리는데 있어서 삼가해야함을 이르는 말이다. 앞서 밝힌대로 신라 무사 집단인 "화랑"의 대표적인 인물로 삼국통일을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김유신"(金庾信, 595~673)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표적인 인물은 "관창"(官昌, 645~660)이다. 신라군은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의 명장인 "계백"(階伯, ?~660)의 지휘하에 오천명의 결사대와 맞서고 있었다. "관창"은 혼자 말을 타고 백제군 진지(陣地)에 나섰다. 처음에는 백제군에게 잡혀서 타고 온 말에 매달려 신라군 진지로 돌려보냈고 백제군으로부터 비웃음을 당했다. 하지만 두번째로 혼자 말을 다시 백제군 진지에 뛰어들었다. 다시 백제군에 붙잡힌 "관창"은 그만 "목"이 잘렸고 잘린 "목"은 타고 온 말에 실려서 신라군 진지로 돌아갔다. 이에 격분한 "신라군"은 "백제군"과의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당시 백제는 거의 망해가는 시기였고 당시 계백 장군은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모두 죽이고 전장에 나온 상태여서 거의 물불을 안 가리는 상태였다. 그리고 백제군은 5000명 결사대로 이들 또한 정신 무장이 제대로 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신라군은 싸움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시에 백제군에 비해서 신라군의 수가 더 많았는데
어차피 백제군은 다 끝난 마당에 죽기 살기로 버티자는 각오의 자세였다. 상황이 이러하였기에 신라군 측에서도 어떠한 정신 무장의 계기가 필요했다. 어떠한 결의의 아이디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점을 노리고 어린 나이의 화랑이었던 "관창"은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희생함으로서 신라군은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화랑"(花郞)은 한자를 한글로 풀이하자면 "꽃처럼 아름다운 사내"라는 뜻인데 화랑을 뽑을때 무엇보다도 실제로 용모단정(容貌端正)한 소년을 단원으로 뽑았다고 한다. 그리고 화랑들은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얼굴에 화장(化粧)을 하고 전투에 나가거나 궁궐(宮闕) 행사에서 화장을 한 상태에서 무예 시범 등을 보였다고 한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고 다시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로 갈라질 즈음, 조정(朝廷)은 물론이고 지배 계층(支配階層)이 부패(腐敗)하였으며 민심(民心) 또한 어지러웠다. 삼국통일(三國統一)에 있어서 "화랑"은 분명히 큰 역할은 하였지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옛말처럼 화랑 또한 점점 망가져갔다.

*본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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