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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문무왕 삼국통일

남북국시대 신라-발해시대

by 느낌 . 2017. 1. 20.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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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
신라 문무왕 김법민

삼국시대(三國時代, 4세기 초에서 7세기 중엽까지)에 "신라"(新羅)에서는 금관가야(金官伽倻)
의 왕족 출신이었던 무장(武裝)인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는 고대시대 삼국통일에 중추
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21세기 넘어서며 "김춘추"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엇갈리고 있다. "김춘추"라는 인물을 외세에 힘을 빌려서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옛 고구려 영토의 4분의 3 이상의 영토를 당나라에 바친 그야말로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逆賊)이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반면에 당시 약소국이었던 "신라"를 삼국통일의 주도권을 잡게하였고 한민족(韓民族)을 일통(一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김춘추의 행동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김춘추는 백제와의 통일 전쟁을 하기 위해서 당시 "연개소문"이 버티고 있던 "고구려"에 먼저 찾아가서 고구려 조정에 군사를 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오히려 감옥에 갇혔고 목숨을 잃을뻔 했다. 신라로 돌아온 김춘추는 이번에는 동쪽 바다 건너 배를 타고 왜(당시의 일본)으로 군사를 청하러 갔지만 "백제"와 사이가 좋았던 "왜"는 김춘추를 도와주지 않았다. 김춘추는 마지막으로 서쪽 바다를 건너서 배를 타고 당나라(당시의 중국)으로 가서 당태종을 만나서 군사를 빌려달라고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은 "나당 동맹"(羅唐同盟)을 맺고 대규모의 군사를 지원받게 되었다. 삼국통일 전쟁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면은 한반도의 평양 이남 지역은 신라의 영토가 되고 그 북쪽 지역의 고구려 영토 지역은 당나라가 자신들의 영토에 편입시키겠다는 조건의 군사 동맹이었다. 김춘추는 당나라에서 돌아오는 뱃길에 고구려 군선이 따라왔다. 이때 그의 호위무사 "온군해"가 옷을 바꿔입고 대신해서 죽어서 김춘추는 목숨을 건졌다.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 1910~1945)에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선생은 "조선 상고사"(朝鮮上古史)라는 이름의 역사서을 남기며 이 책에서 "김춘추"라는 인물을 두고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라고 날을 세워 비판하였다. 삼국시대에 굳이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어야 했는냐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삼국시대 말기 당시에 신라가 아무리 외세의 힘을 빌렸다지만 백제와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할 능력이 있었더라면 물론 지금 오늘날의 대한민국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처참한 결과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백제와 고구려는 당시에 삼국통일을 할 만큼의 국력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럴 능력이 없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장차 나라의 존망을 좌지우지 할 위험한 거래를 할 당시에 백제와 고구려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눈이 어두웠다. 백제는 오래전부터 "왜"(倭 ,당시의 일본)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각별한 친분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왜"(당시의 일본)는 백제가 주도적으로 삼국통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정도로 동아시아에서 세력이 크지 않았다.백제는 "나당 연합군"(羅唐聯合軍)에 군사력으로 밀려서 멸망하였다. 그 당시에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이 이끄는 5천명의 결사대가 신라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명 군사들에게 크게 졌다. 백제 왕실에서 내분도 일어났다.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이 함락되었고 백제는 멸망했다. "왜"는 이 상황을 두고 가만히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백제 부흥군(百濟復興軍)의 요청으로 왜 왕실은 백제 왕자 부여풍을 백제에 보냈다. 그리고 "왜"는 대규모의 지원군을 보냈지만 백제 왕실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백제 부흥군이 새로운 백제의 왕으로 세운 부여풍과 백제 복신 장군이 서로 대립하였고 백강 해상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은 왜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고구려(高句麗)의 경우는 당시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막리지"라는 벼슬 자리에 올라서 주요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는 중국의 고대 왕조인 "수나라" 시대와 "당나라"시대 중후반 즈음의 시기인 오늘날의 중국 세력에게서 어느 정도 군사력으로 맞서서 고구려를 지켜내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힘겹게 자주적인 독립을 지켜냈던 고구려도 삼국통일을 이루어 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하였고 국토(國土)가 황폐화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서 연개소문의 자식들간에 내분(內紛)이 일어났다. 연개소문의 아들 3형제 중에서 연남생이 나당연합군에게 투항(投降)을 하였고 고구려 내에서 연개소문의 자식들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내정(內政)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연개소문이 죽은 이후 당시의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했다. 신라가 한민족의 고대시대 역사를 바꾸었고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김춘추"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게 나올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점은 "삼국시대"(三國統一)에 "신라"(新羅)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었던 '당나라"(唐, 지금의 중국)의 처음 목적은 단순히 "신라"를 군사적으로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든 못 이루든간에 우리 영토를 모두 "당나라"가 차지하기 위해서 행동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춘추"가 당나라(중국)에 가서 군사동맹인 "나당동맹"(羅唐同盟)을 맺을때 주요 내용이 "당나라"와 "신라"가 함께 군사를 일으켜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양성"(平壤城)을 지역 경계로 하여 그 이하 한반도 남부 지방을 신라 영토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난 이후에 "당나라"는 옛 백제 땅과 옛 고구려 땅에 당나라가 지방 정부를 두고 당나라로 편입시키려 했고 신라 영토도 당나라의 영토로 편입시켜서 식민지(植民地)로 만들어서 당나라가 직접 통치(統治)하려고 했다. 여기서 "신라"의 30대왕인 "문무왕"(文武王)은 다시 잃어버린 나라를 재건하려는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여서 힘을 합쳐서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 평양성 이북까지 몰아냈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옛 "고구려"(高句麗) 영토가 모두 "당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사실상 신라 30대왕 문무왕(文武王)의 아버지 "김춘추"(신라 31대왕 무열왕, 武烈王)가 독자적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사실상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삼국통일을 마무리 지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당나라 황제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와의 나당 동맹 약조(約條)를 어기고 옛 백제 땅과 옛 고구려 땅에 옛 후손 왕족을 관리로 내려보내어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삼국을 식민지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문무왕"은 옛 백제 유민과 옛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여서 그들과 함께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었다. 그러나 우리의 영토였던 요동 만주 지역과 베이징 요서 지역을 중국에 빼앗겼다. 오늘날의 한반도가 절반으로 절단된 상황의 현실을 보아서 동북 아시아 현실을 되돌아 보았을때, 우리나라는 "남한" 기준으로 북서쪽에는 "러시아"와 "중국"과 "북한"이 위치해 있고 동쪽에는 "일본"이 위치해 있으며 "미국"의 영향권 안에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오래전 "신라"의 "김춘추"라는 인물이 지향했던 정책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한반도 주변의 나라 사이에서 치밀한 외교력을 가지고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심을 이루는 확고한 주도권을 잡아야한다.

*본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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