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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倭寇 일본 바다 해적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1. 8. 29.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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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倭寇)는 아주 오래전부터 오랜 세월동안 한민족(韓民族)을 괴롭혔다. 왜구(倭寇, Japanese raiders)는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우리나라 바닷가를 무대로 약탈(掠奪)을 일삼던 일본 해적(海賊) 무리이다. 여기서 구분해야 할것은 왜구는 왜군(倭軍)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왜군(倭軍)은 일본의 국가를 대표하는 일본 본국의 본토 정예부대 정규군 군대이다. 왜구(倭寇)는 고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가장 많이 한반도로 쳐들어왔다. 특히 고려 말기에 약 40년 동안 가장 가 커서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왜적(倭敵)의 침입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도 자주 침입하였으며 그 피해도 적지 않았다. 왜구는 "왜가 도둑질한다"는 뜻이고 고려 말 이후로 그들의 약탈 행위가 더욱 심해졌다. 왜구(倭寇)라는 한자 표현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서기 414년의 "왜구 신라"(倭寇新羅)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구(寇)는 "떼를 지어 침략하다"라는 단어의 동사이다. 고려사에도 고종 10년(1223년)에 "왜"가 김해(금주)를 침략했다"는 왜구금주(倭寇金州)를 단어를 근거 삼아서 주로 "구"자는 동사로 쓰이다가 1300년대가 되면"왜구" 자체가 "일본 해적"이란 뜻의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그리고 왜인(倭人)들의 해적 행위를 표현하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신라(新羅)의 박혁거세(朴赫居世) 8년에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기록이 있고 기원전 50년(서기 11년)에 신라왕 남해 차차웅 시절에 신라에 왜구가 침입했다고 한다. "왜구"라는 이름 그대로 대부분은 일본 사람이었으나 왜구들 중에는 중국 명나라 사람도 있었고 조선 사람, 동남 아시아 계통의 사람, 유럽의 포르투갈 사람도 있었다. 고려대에는 여진족(女眞族)이 해적이 되기도 했다. 왜구는 일본 남북조 혼란기의 남조 세력권에 있던 일본 규슈(九州)지역 일대에서 살고 있던 일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주요 근거지는 일본 쓰시마 섬(馬嶋)과 마쓰우라(松浦), 이키(壹岐) 등의 지역이었다. 삼국시대에 백제(百濟)의 아신왕이 사이좋게 지내던 왜(倭)나라에 태자 전지(腆支)를 보내서 사를 요청했고 고구려에 지배를 받고 있던 신라(新羅)의 영토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라는 구려에군사적으로 도와달라고 구원을 요청했고 광개토대왕은 보병 기병 5만명의 군사를 이끌신라를 도와서 왜군을 무찔렀다. 그리고 동해 바다를 건너가서 왜의 근거지를 공격했다. 서기 663년에는 신라와 당나라(唐)가 나당동맹(羅唐同盟)을 맺고 일본(日)이 백제의 부흥군(百濟復興軍)을 돕기 위해서 배를 타고 동해 바다를 건너서 군대를 보냈다. 전라도의 백강 전투(白江戰鬪)에서 나당연합군은 4백여 척을 불태우며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신라는 왜(倭)에 사신을 보냈고 왜의 텐지 천황(天智天皇)에게 군사를 더 이상 보내지 말라며 서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불가침의 조약을 맺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일본에 군사를 보내어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을 하였다. 세종대왕 즉위 시이었던 1419년 6월에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하여 정벌한 사건으로 크게 보면은 이보다 앞서서 일어났던 고려시대 창왕 때와 조선 태조 때의 정벌까지도 포함해서 말하기도 한다. 대마도 정벌에서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 초기의 수군(水軍) 확대 육성과 화포(火砲) 무기 개발이 있었기에 왜구 소탕 작전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 한민족이 동해 바다를 건너와서 약탈과 공격을 받은 일이 있었으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 민족이 직접 왜구를 공격하기 위해서 일본 본토에 군사를 보내어 싸운 일도 있었다.

*본인 작성, NAVER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나무위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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