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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아즈텍 마야 잉카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2. 1. 19.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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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
잉카 문명
중남미 라틴 아메리카 민족 구성 지도 및 사용하는 언어

아즈텍 문명(Aztecan civilization)
- 아즈텍 문명은 서기 1520년에 유럽에서 에스파냐(스페인, Spain)가 침입하기 직전까지 멕시코 고원에 발달한 아스테카 왕국의 인디오 문명이다. 독특한 우주관의 문화 관습과 그림 문자, 거대 한 돌로 만든 건축물, 역법 따위가 발달했다. 아스테카는 1250년경부터 1521년까지 멕시코 분지(현재의 멕시코 시티)에서 일어났다. 이 문명을 건설한 원주민은 12세기 초반에 멕시코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나우아틀 언어를 사용했다. 이 종족을 가리켜 흔히 아스테카인이라고 부른다. 아스테카(azteca)라는 말은 이 종족의 설화에 등장하는 원초적인 고향인 아스틀란(Aztlán)에서 유래했으며 "아스틀란 출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스테카인은 아스테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자기 종족을 가리킬 때는 메시카(mexica)인이라고 불렀다. 에스파냐에게 식민지 지배를 받던 시대에는 이곳 원주민을 메시카인이라고 칭했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와 알렉산더 폰 훔볼트, 윌리엄 프레스코트 등의 유럽과 미국의 학자들은 아스테카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메시카라는 단어가 멕시코인(mexican)의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일 수 있어서 구분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메시카의 의미에 대해서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달의 배꼽이 있는 곳"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달 호수의 중심"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통상적인 설에 따르면 아스테카인이 숭배하던 전쟁의 신(神) 우이칠로포츠틀리의 또 다른 이름인 메시틀리에서 파생된 말이며 그 뜻은 "우이칠로포츠틀리가 있는 곳’"이라고 해석한다. "멕시코"라는 나라 이름도 "메시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아스테카인이 살던 테노츠티틀란은 호수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당시에 인구는 15만명에서 20만명 정도였고 흔히들 아스테카라고 부르는 테노츠티틀란은 그 자체가 국가였다. 당시 중미 지역에는 이러한 도시국가가 많았다. 호수 주변에만 40여 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도시국가 테노츠티틀란이 1428년에 호수 주변의 도시국가 테스코코 및 틀라코판과 삼각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정복 전쟁을 벌여서 멕시코 분지와 그 너머의 수많은 도시국가를 정복함으로써 이른바 아스테카 제국으로 성장했다. 일부 학자는 제국이라는 말보다 정치 연합체, 헤게모니, 거대한 규모의 국가, 느슨한 제국, 군사력에 바탕을 둔 상업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아스테카와 피정복 도시 국가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정치 연합체가 가장 적절한 표현이지만 여기에서는 관례에 따라 아스테카 제국이라고 부른다. 테오티우아칸은 멕시코 시티에서 북쪽으로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태양 피라미드와 달 피라미드로 유명한 이 문명은 기원전 1세기에 일어나서 7세기 중반에 세력이 약해졌다. 아스테카인에게 테오티우아칸은 신들이 사는 도시였다. 톨테카는 9세기부터 12세기까지 존속한 문명으로 중심 도시인 툴라는 멕시코시티에서 북쪽으로 75km 거리에 있다. 멕시코 인류학계의 공식적인 견해에 따르면 아스테카인은 톨테카인을 예술과 건축의 거장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톨테카 문명의 계승자라고 자부했다. 이런 견해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아스테카인이 이상으로 여긴 도시는 툴라(Tula)가 아니라 톨란(Tollán)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톨란이 툴라가 아니라 테오티우아칸이라고 주장한다.

마야 문명 (Maya civilization)
- 기원 전후부터 9세기까지 중앙 아메리카의 과테말라 고지에서 유카탄 반도에 걸쳐 번성한 마야족의 고대 문명이다. 옥수수 재배 농사를 주로 했고 지배자가 자신을 신(神) 또는 신의 대리인으로 내세워서 절대적인 권력으로서 백성을 지배하는 정치 체제였다. 매우 큰 돌로 건축물을 만들었고 천문, 역법, 상형 문자가 발달했다. 13세기의 톨테크족의 침입과 1532년에는 에스파냐(스페인)의 침입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마야 문화가 번성한 지방은 3개 지역으로 구분되나 그 중심을 이룬 것은 과테말라 북부의 페텐 지방으로부터 서쪽은 멕시코의 타바스코, 동쪽은 벨리즈 지방에 이르는 중앙 지역이었다. 여기에 유카탄 반도(半島)의 북부 지방 및 과테말라의 높은 지대 그리고 차파스 지방으로부터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남부 지방 등 2개 지역 등을 지배하였다. 언어 연대학적 연구에 따르면 마야 어족의 조상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작은 부족으로서 이들이 남쪽으로 이동해서 기원전 3000년대 중반에는 서부 지방의 과테말라의 높은 지대에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1000년 사이에 이 부족이 두어족으로 갈라져 하나는 북서쪽으로 진출하여 멕시코만(灣) 연안의 아스텍어족(語族)을 형성하였고 다른 하나는 북쪽으로 이동해서 페텐저지(低地)에서 유카탄 지방에 이르러 유카테크 어족이 되었다. 다시 기원전 1000년대 전반에 마야 어족의 중심 근원으로부터 촐 및 촌탈 등 두 어족으로 갈라져 나와서 중앙지방의 저지에 들어가서 북부의 유카테크어족과 접촉하였다고 한다. E.톰프슨은 촐어족이 마야 고전문화를 창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초기 마야에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가 거의 드물어서 과테말라 태평양 연안의 오코스(기원전 1500년) 및 콰도로스(기원전 1000년) 문화나 과테말라 고지카미날퓨 유적(遺蹟)의 알레파로기(期) 및 라스 차루카스기(기원전 5 ~ 6세기경)에서도 이들 문화 후에 형성되는 문화 예술 작품에서 마야 문화의 특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초기 마야의 기원에는 멕시코의 올멕 및 이자파 문화의 영향이 컸다는 학설이 거의 굳어졌다, 가장 오래 된 마야적 문화는 페텐 지방 서부 지방의 시에 문화와 북부 지방의 마몬 문화인데 마몬 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5세기로 추정되어 카미날퓨의 라스 차루카스기(期)와 비슷하다. 시에 문화는 고전 마야 유적인 알탈드 사크리피 시오스와 세이발의 하층에서 또한 마몬 문화는 와샤크툰과 티칼의 하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문화에 이어 카미날퓨의 밀라프로레스기(期)와 중부 지방의 낮은 지형에서 마야 지대의 차카넬 문화에 이르렀고 마야문화의 기본양식이 확립되었다. 밀라프로레스기에는 그 뒤에 발달되는 신성 문자(神聖文字)의 원형(原型)이 나타났다.

잉카 문명 (Inca civilization)
- 남아메리카 안데스 지대의 페루를 중심으로 16세기 초까지 잉카족이 이루었던 청동기 문화, 직물, 금세공, 계단형 밭농사의 농업 문화가 발달하였다. 종교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숭배의 다신교이다. 동시에 그 사회적 중심을 이루었던 부족 및 그 지배 계급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잉카라고 불렀다. 잉카족은 케추아족이라고도 부르며, 남쪽 지방의 아이마라족이나 북쪽 지방의 창카족 등과 함께 페루 인디오의 한 집단이었다. 잉카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전설은 태양신의 자녀인 4명의 형제와 4명의 자매가 현재의 꾸스꼬시 남동쪽 30㎞ 지점에 있는 한 동굴에서 태어났고 그 옆의 두 동굴에서는 그들을 보좌하는 여러명의 일꾼들이 태어났는데 이들이 바로 잉카인들의 조상이다. 전설에 의한 잉카 제국의 기원은 그리스도 기원 후 12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망꼬 까빡이 이끈 부족은 처음에는 정착을 하지 않은 채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 후 그들은 꾸스꼬 계곡에 정착하여 농경에 적합한 곳을 찾아내어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세력을 넓혀나갔다. 이 때 그의 누이 마마 우아꼬(Mama Huaco)의 역할이 컸다. 그녀는 한 사나이를 돌로 죽인 뒤 그 폐를 도려내어 위엄을 과시함으로써 원래 주민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망꼬 까빡이 잉까로 군림한 이후 200년 동안 잉까 문명은 실제로 작은 부족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본인 작성, NAVER 국어사전, 라틴아메리카 고대문명, 두산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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