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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 모용씨-갈족 석씨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2. 8. 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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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씨(容氏)는 고대시대 선비족(鮮卑族)의 하나이다. 중국 대륙의 요서 지방에서 살다가 서기 3세기경부터 중국 동북부 지역으로 옮겨 가서 전연(前燕)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전연이 망하자 후연(後燕)이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후연이 망하자 서연(西燕), 남연(南燕)이라는 나라가 차례대로 건국했다. 모용씨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중국 내륙에 자주 침입을 했고 이후에 흉노(匈奴)에게 멸망을 당한 동호(東胡)의 후예라는 설이 있는데 분명하지는 않다. 선비족이 역사 기록에 나온 것은 흉노의 피지배 종족으로 1세기 초부터이고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1세기 말에 북흉노가 후한(後漢)의 공격을 받고 세력이 약해지자 선비족은 흉노에 이어서 몽골 지역에서 번영하였다. 2세기 중엽에 단석괴(檀石槐)가 선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운 후 자주 후한(後漢)에 침입하는 등 중국을 압박하였다. 단석괴가 죽은 후에는 가비능(軻比能)이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위,촉,오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중국에 자주 침입하였으나 그가 위나라(魏)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었고 선비족 모용씨는 다시 분열되었다. 3세기 중엽에는 모용(慕容), 걸복(乞伏), 독발(禿髮), 탁발(拓跋) 등의 부족집단이 내몽골 각 지역에서 땅을 나누어 가지고 굳게 지켰다. 그러면서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고 점차 화북(華北) 지역으로 이동했다. 5호 16국(五胡十六國) 시대에는 연나라(燕, 모용씨), 진나라(秦, 걸복씨), 양나라(凉, 독발씨)가 화북 지역에 각각 나라를 세웠다. 북위(北魏, 탁발씨)는 화북 지역의 전체를 통일하여 이른바 북조(北朝)라는 나라의 기초를 형성했다. 전연(前燕)은 맨처음 세워진 연나라(燕)이다. 3세기 말에 선비족(鮮卑族)의 추장 모용외(慕容廆)가 극성(棘城)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를 대선우(大單于)라고 불렀다. 그리고 진나라(晉)의 관작을 받아서 반독립적인 체제를 형성했다. 서기 337년에 그의 아들 모용 황(皝) 때에 스스로 연왕(燕王)이라고 부르고 단씨(段氏) 선비족을 공격하여 물리치고 허베이성(河北省) 북부 지방을 지배하였다. 도읍을 용성(龍城)으로 정했다. 그리고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환도(丸都)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서기 345년에 진나라(晉)의 연호를 쓰지 않기로 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이후의 자손은 황제(黃帝)라고 칭하였고 도읍을 업(鄴)으로 정했다. 통치 영역은 한때 허베이, 산둥, 산시, 허난, 랴오닝에까지 이어졌으나 서기 370년에 모용 위(暐) 때에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에게 멸망당했다. 후연(後燕)은 전연(前燕)의 유제(幽帝, 慕容暐)의 숙부(淑父, 작은 아버지)인 모용수(慕容垂)가 세운 나라이다. 모용수(世祖, 武成帝)는 서기 384년에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중산(中山)에 도읍을 정하였다. 가장 전성기였을 때는 영토가 중산과 업(鄴)을 중심으로 한 화북평야(華北平野) 일대에서 북쪽으로는 남몽골, 고구려의 국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북위(北魏)가 강대해짐에 따라 분쟁이 자주 있었고 서기 394년에 북위를 공격하였으나 참합파(參合陂)에서 크게 졌다. 모용수가 죽고 난 이후 북위 군사에게 도읍이었던 중산이 함락되어 모든것이 파괴되었다. 이후 후연(後燕)의 4대왕 모용희(慕容熙)가 나라의 정치 상황을 악화시키자 서기 407년에 풍발(馮跋) 등이 모용희를 살해하고 모용운(慕容雲)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모용운은 본시 고구려 사람으로 고화(高和)의 손자였다. 고구려 이름은 고운(高雲)이다. 당시에 광개토대왕은 모용운에게 사신을 보내어 동족의 우의를 표하기도 했다. 서기 409년에 모용운을 죽이고 한족(漢族)인 풍발(馮跋)이 연왕이 되었다.

갈족(羯族) 석씨(石氏)는 중국의 5호 16국 시대에 살았던 민족이다. 갈족은 초기에 흉노족의 지배를 받았던 피지배 종족의 하나로서 흉노의 일파로 여겨졌다. 갈족의 갈(羯)은 "거세한 양"을 뜻하는데 하지만 갈(羯)은 중고한어로 캿(kiat) 정도로 재구성된다. 고대 튀르크어로 ‘khes’ 또는 ‘kit’는 돌을 뜻하며 예니세이어족의 남예니세이어파에 속한 아린-품포콜어에서도 돌을 'kes' 또는 'kit'이라고 하므로 후조 (後趙) 황족의 성씨가 돌을 뜻하는 석(石)씨라는 점과 연결지어서 민족명인 '갈'은 돌을 뜻하는 단어에서 기원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전조(前趙)는 한나라(漢)의 황제였던 유연(劉淵)의 손자 유요(劉曜)가 서기 318년에 장안(長安)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나라이다. 산시성(山西省) 북부 지역에 살던 흉노족(匈奴族)은 서진(西晉)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족장 유연(劉淵)을 대선우(大單于)로 옹립하고 서기 304년에 서진의 통치를 이탈하여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고 지어서 불렀다. 그의 아들 총(聰) 시절에 뤄양(洛陽), 장안(長安)을 함락시키고 서진을 멸망시켰다. 유요(劉曜)가 황제가 되자 국호를 조(趙)라고 고치고 장안에 도읍하였다. 후조(後趙)는 흉노(匈奴)의 별종(別種) 갈족(羯族) 출신인 석륵(石勒)이 전조(前趙) 유총(劉聰)의 부장으로 활약하다가 319년 전조로부터 자립하여 대선우조왕(大單于趙王, 高祖, 明帝)이 되어 양국(襄國)을 근거지로 하였고 화북(華北) 지역을 지배하였다. 서기 329년에 전조를 멸망시키고 그 연고지를 합병하였고 석륵이 죽은 뒤 서기 334년에 석호(石虎, 太祖, 武帝)가 그 유업을 이어받아서 업(鄴)에 도읍을 옮기고 외정(外征)과 토목사업을 하였다. 서기 349년 석호가 죽자 정변이 잇달아 일어났고 한인(漢人) 염민(冉閔)에게 제위를 빼앗겼다. 그 뒤 양국에서 즉위한 석지(石祗)도 피살되어 멸망하였다. 갈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후조의 건국자인 석륵부터이다. 석륵은 본래 흉노계 국가인 전조의 황제였던 유요의 부하 장수였다. 그러나 이후 석륵의 세력이 커지면서 유요는 석륵을 의심하게 되었고 마침내 석륵이 보낸 부하였던 왕수를 자신을 염탐하러 보낸 자라고 판단하여 죽였다. 이에 반발한 석륵은 반란을 일으켜서 후조(後趙)를 건국했다. 후조를 건국한 이후 석륵은 동진(東晋)에 군대를 보내서 화북 지역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석륵이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석홍은 석륵의 조카였던 석호에게 황제의 자리에서 폐위당했고 황위를 찬탈한 석호는 이후 무리한 원정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폭정으로 민심을 잃었다. 석호가 죽은 이후 후조는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혼란에 빠졌으며 결국 후조는 한족 장수였던 염민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본인 작성, NAVER 국어사전, 두산백과, 나무위키, 위키백과, 원불교대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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