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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 성장 과정 정리

고대시대 백제-고구려시대

by 느낌 . 2022. 1. 2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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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건국 초기에 한반도 압록강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몽은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북부여"에서 태어난 주몽(高朱蒙)은 북부여(北夫餘)를 떠나서 자신의 성(性)을 고(高)씨로 정하고 오녀산(五女山)에 성을 쌓고 도읍지로 정하여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했다. 고구려의 처음 시작은 "졸본부여"에서 나왔다. 그래서 "고구려"를 "졸본부여"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주몽의 세력은 처음에 그리 크지 않았다. 고주몽을 따르는 백성들도 그리 많치 않았다.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고주몽도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복속시켜서 그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그렇게 정복한 나라 중에 하나가 비류국(沸流國)인데 비류국은 고구려 건국 초기에 지금의 압록강 지류인 동가 강(佟佳江, 渾江)유역에 위치하였던 작은 나라였다. 고주몽(高朱蒙)이 비류수(沸流水)에 채소잎이 떠내려옴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사냥을 하면서 비류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니 비류국의 송양왕(松讓王)이 있었다. 고주몽과 송양왕은 활쏘기 시합을 했고 주몽이 이겼다. 송양왕은 패배를 인정하고 나라를 고주몽에게 바쳤다. 이후 고주몽은 송양왕에게 지방 군주로서의 벼슬을 내렸고 옛 비류국 땅을 다물도(多勿都)라고 이름을 지어서 불렀다. 고주몽은 졸본부여(卒本扶餘)의 토착세력이었던 남편을 잃은 과부 신세의 지방 세력가의 딸인 "소서노"를 왕비로 맞아들이면서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 중의 한명을 주몽이 죽고 난 다음의 고구려 왕으로 삼겠다는 조건으로 서로 혼인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소서노는 자신이 살아가던 터전의 기반으로 고주몽을 왕으로 성장시켰다. 고구려 제2대 왕위에 오른 류리왕(유리왕)은 옛 비류국 송양왕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고구려는 이렇게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흡수하며 영토를 확장하고 세력을 키웠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승승장구 하며 쉽게 다 이루어지는 일은 없는 법이다. 길을 가다보면은 큰 장애물도 만나고 크고 작은 상처도 입을 수 있는것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일상이다. 하물며 나라가 성장하는데 있어서 좋은 일만 있고 막히는 일이 없겠는가. 고구려는 지리적인 특성상 중국 중원 세력과 부딫힘이 적지 않았다. 특히 한족 중국 세력과의 전쟁이 셀 수 없이 많이 일어났다. 한나라(漢)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옛 고조선 영토에 4개의 행정구역으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고 다스렸다. 고구려는 한나라가 설치한 옛 고조선 영토인 한사군을 차례대로 정복하며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었다. 고구려 영토의 북쪽에는 중국 세력 이민족이 자리잡고 있었고 한반도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 가야가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백제는 고구려에 큰 위협이 되었다. 북방 민족들과 전쟁을 하기도 바쁜데 바로 남쪽 지방에서도 큰 위협을 받고 있으니 고구려는 지리적 특성상 양쪽에서 적을 막아내야 했기 때문에 불리한 점이 많았다. 결국은 생각해낸것이 공격을 받으면 대적하며 싸우면서도 싸움을 피할 수 있다면은 이웃 나라와 화친(和親)을 맺고 서로 침략하지 않겠다는 군사동맹을 맺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쓰는 수 방법 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해서 서기 668년 멸망한 고대시대 왕조 국가였다. 멸망하기 전까지 무려 7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불리한 지리적 구조를 극복하고 국가를 유지했다. 그렇게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강력한 군사를 키웠고 튼튼하고 안정된 성곽 구조물을 지었으며 나라 주변 정세를 넓은 시야로 바라보며 대처하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꾸준히 끊임없는 전쟁 준비와 안정된 내부 사회 안정을 기반으로 밖으로는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여 영토로 삼고 지키면서 성장했기에 고구려는 지속될 수 있었다.

*본인 작성, NAV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삼국유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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