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백제 건국 멸망 과정 정리

고대시대 백제-고구려시대

by 느낌 . 2021. 6. 20. 06:35

본문

백제(百濟)는 우리나라의 고대시대에 삼국시대(三國時代)에 고구려 신라 가야 못지 않게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한반도 내부는 물론이고 한반도 서쪽의 중국 동부 해안 지역과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 그리고 왜(倭, 지금의 일본)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한 나라였다. 백제는 서기전 18년에 부여족(扶餘族) 계통인 온조(溫祚)집단이 현재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하였다. 4세기 중반에는 한반도 북쪽으로는 황해도에서부터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을 영역으로 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한반도 북부 지역의 중국 만주 일대의 졸본(卒本)이라는 지역에 소서노(召西奴)라는 이름의 여인이 살고 있었다. 소서노는 졸본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여식(女息)으로 처음에는 우태(優台)라는 이름의 남자와 결혼을 해서 두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 두 아들의 이름이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이다. 고주몽(高朱蒙)은 북부여(北扶餘) 출신으로 북부여를 떠나서 남쪽으로 내려왔고 남편을 잃고 두 아들과 함께 살아가던 졸본 여인 소서노와 결혼을 했다. 그 이후 졸본 지역에 고구려(高句麗)를 건국(建國)했다. 고주몽이 고구려 제1대 왕(王)이 되었고 소서노는 고주몽의 왕비(王妃)가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소서노가 자신의 아들 중의 한명이 고주몽 다음 대에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는 조건으로 고주몽과 혼인동맹(婚姻同盟)을 맺고 결혼을 했다는 점이다. 세월이 흘러서 고주몽이 북부여에 두고 온 그의 첫째 부인 예씨와 친아들인 유리(琉璃)가 부러지 칼을 가지고 왔고 고주몽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머지 부러진 칼을 서로 맞추어 보고 그들을 알아보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고주몽은 유리를 자신의 다음 대의 세자로 책봉(冊封)하고 소서노와의 혼인동맹을 깨버린다. 그렇게 아무런 연고(緣故)도 없이 버려진 신세가 되어버린 소서노는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 한강 부근에 위례성(慰禮城)을 짓고 "백제"(百濟)라는 나라를 세웠다. 비류(沸流)는 처음에 지금의 인천(仁川) 지역인 미추홀(彌鄒忽) 지역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웠다. 이렇게 처음에 백제는 2개였다. 그러나 당시에 인천 지역은 먹는 물이 짜고 토지는 소금밭(염전,鹽田, saltern)뿐이니 사람 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비류가 죽고 난 이후 미추홀 백성들은 온조가 세운 위례성 백제 땅으로 옮겨갔다. 이렇게 백제는 건국하였다. 백제의 마지막 왕 제31대 의자왕(義慈王) 시절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백제가 아주 볼품없게 변해갔다. 백제는 의자왕 시절에 부여성충(扶餘成忠), 부여윤충(扶餘允忠), 흥수(興首), 의직(義直). 계백(階伯) 등 지략(智略)이 뛰어나고 현명하며 백제를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로 몸 바쳤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있었다. 그래서 의자왕은 그들을 앞세워서 김춘추의 여식(女息)인 고타소(古陁炤)와 그녀의 남편인 품석(金品釋)이 있던 신라(新羅)의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을 공격해서 차지하고 신라의 서부 변방 지역의 신라의 수 많은 성곽들을 함락(陷落)시킬 수 있었다. 신라의 왕족인 김춘추(金春秋)는 자신의 사위와 딸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백제를 공격하려고 당시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조정(朝廷)을 이끌던 고구려(高句麗)를 찾아가서 군사를 요청했다. 마침 그때 백제의 상좌평(上佐平) 벼슬을 하고 있던 부여성충(扶餘成忠)도 백제와 고구려의 양국 간에 서로 전쟁(戰爭)을 하지 않고 교류(交流)를 하고 지내자는 뜻에서 화친(和親)을 맺고자 고구려에 갔다. 부여성충은 지혜를 발휘해서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서로 침략(侵略)하지 않겠다는 화친을 맺고 돌아갔고 김춘추는 감옥에 갇혔다. 고려시대의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백제는 의자왕이 말년에 사치(奢侈)와 향락(享樂)에 빠져서 국정(國政)을 돌보지 않고 지내며 전쟁 준비를 소홀히 하여 백제가 망했다고 써 놓았지만 백제의 내부 사정은 나라가 망한 이유는 이와는 다르다. 당시에 좌평(佐平) 벼슬을 하고 있던 상영(常永)과 임자(任子), 금화(錦花) 등이 의자왕이 아끼고 의지하던 부여성충(扶餘成忠)과 그를 따르는 부여윤충, 흥수 등을 미워하고 시기(猜忌)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과 서로 계략(計略)을 꾸미고 힘을 합쳐서 부여성충과 그를 따르는 신하들을 의자왕에게 모함(謀陷)하여 죄인으로 만들어서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의자왕의 왕자(王子)들도 서로 의견이 달라서 내분(內分)이 일어났다. 그리고 서로 싸웠다. 백제 장군 계백(階伯)이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죽이고 서기 660년 7월 황산벌(黃山伐, 지금의 충청도 논산)에서 5천명의 결사대(決死隊)를 이끌고 신라(新羅)의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명의 군사와 싸웠으나 크게 패배를 당했다. 그 이후 사비성(泗沘城)이 신라와 당나라 군사들에게 함락당했다. 그리고 사실상 백제 왕조는 멸망했다. 치열했던 백제부흥운동도 나당동맹군에게 진압되었다. 백제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본인 작성. 조선상고사, 삼국사기 백제본기 참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