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고구려 연개소문 평가하다

고대시대 백제-고구려시대

by 느낌 . 2021. 10. 4. 08:54

본문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고구려 말기 시절(高句麗)에 권력(權力)을 잡고 고구려 조정(調整)에서 중심 인물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에 고구려에서 "대대로"(大對盧)라는 이름의 벼슬(관직, 官職)을 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은 "군주"(君主)에 해당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리였다. 머지 않아서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죽었고 이에 따라서 연개소문은 그의 아버지 벼슬이었던 "대대로" 벼슬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고구려 조정의 귀족들은 연개소문이 "대대로" 자리에 오르는 것을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연개소문이 거칠고 포악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라고 미워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귀족들을 일일히 찾아다니면서 체면을 버리고 고개를 숙이고 예의로서 대했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귀족들의 동의하에 대대로의 벼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의 고구려 왕은 영류왕(榮留王)이었다.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정치적으로 견제했는데 당나라(唐)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 쌓고 있던 천리장성(千里長城)의 감독관으로 연개소문을 임명했다. 그리고 멀리 변방 지역으로 쫓아내려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정변을 준비했다. 쿠테타(stroke of state, blow of state)였다. 연개소문은 열병식(review, 閱兵式) 행사에서 군사(軍士)를 숨기고 있다가 고구려 대신들을 모두 초대했고 모이게 한 이후에 군사들을 시켜서 문무 대신들을 죽였다. 그렇게 죽은 사람의 숫자가 무려 백여명 가까이 되었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영류왕(榮留王) 마저 죽이고 그 시체를 토막 내어 하천(河川, river)에 버렸다. 마침내 정권(政權)을 잡은 연개소문은 당나라(唐)에게 고구려 자연 지세 지역을 그려서 만든 지도(地圖)인 봉역도(封域圖)를 바치며 유화책(宥和策) 정책을 대외 정책으로 삼았던 영류왕의 정책을 바꾸고 대신에 당나라(唐)에게 무력으로 대항하겠다는 강경책(強硬策)으로 대외정책을 바꾸었다. 백제(百濟)의 공격으로부터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이 함락당하자 김춘추(金春秋)는 군사(軍士)를 빌려서 백제(百濟)를 멸망(滅亡)시키기 위해서 고구려에 사신(使臣)으로 찾아갔다. 연개소문은 그가 세운 보장왕(寶臧王)과 의논하여 내린 결론을 말하며 신라가 과거에 빼앗은 고구려가 땅이었던 죽령 이북땅을 신라가 돌려주면은 고구려의 군사를 빌려주겠다고 요구했다. 그러자 김춘추는 신라 왕실의 신하(臣下)된 몸으로 그런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감옥에 가두었고 죽이려 했다. 김춘추는 연개소문에게 죽령 이북 땅을 돌려주겠다고 거짓 약속을 했고 김유신(金庾信)은 1만명의 군사를 데리고 고구려로 향했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신라로 돌려보냈다. 이후에 김춘추는 배를 바다를 건너서 중국으로 갔고 당나라(唐) 당태종과 군사동맹(軍士同盟)을 조약을 맺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신라로 돌아가던 김춘추를 군사를 보내서 죽이려 했다. 그러자 김춘추는 고구려 군사들을 속여서 배에서 몰래 빠져나와 살아서 신라로 돌아갔다. 연개소문은 당나라(唐)와의 전쟁에서 요동성(遼東城)이 함락(陷落)당했고 안시성(安市城)에서 그 공격을 막을 수 있었으나 연개소문이 죽고 난 이후에 그의 아들 3형제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내분(內紛)을 일으켜서 결국은 전체적으로 고구려 세력과 국력이 약해졌다.

*본인 작성.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