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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공민왕 비극 역사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2. 7. 26.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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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노국 공주

태조 왕건(王建)이 세운 나라인 고려(高麗)는 어느새 국운이 다 하고 있었다. 공민왕(恭愍王)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고 충혜왕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원나라 공주가 아니라 덕비 홍씨로 고려인이다. 공민왕은 서기 1330년에 볼모(인질)로 원나라로 강제로 끌려가서 머물다가 서기 1351년에 다시 고려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21세에 원나라 위왕(魏王)의 노국 공주(魯國大長公主)와 결혼을 하면서 고려의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고 고려의 국왕이 될 수 있었다. 당시에 원나라의 황제였던 순제(順帝)의 제2황후 기씨(기황후, 奇皇后)는 처음에 고려에서 원나라에 공녀로 바쳤던 고려 여인이었다. 그러다가 기씨가 순제의 신임을 얻어서 원나라의 제2황후가 되었다. 그러면서 기씨의 혈육 형제들이 권력을 잡았고 친원파가 되어 고려의 내부 정치에 간섭을 했다. 친원파들은 공민왕에게 반기를 들었고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왕의 자리에서 몰아내려했다. 공민왕은 친원파를 제거해 나갔고 원나라 순제도 고려와 대립하는것을 원하지 않아서 반란을 일으킨 "최유"를 고려에 보냈고 최유는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덕흥군"은 귀양을 갔다. 이렇듯이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친원파를 척결하고 몰아내며 개혁 정치를 펼쳤다. 그러던 와중에 공민왕(恭愍王)의 아내인 노국 공주는 공민왕의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그래서 공민왕의 뒤를 자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공민왕은 신돈(申旽)의 비첩이었던 "반야"(般若)라는 이름의 여인을 곁에 두었고 "모니노"(牟尼奴)라는 자식을 두었다. 공민왕은 자신의 왕비인 노국 공주가 죽게 되자 깊은 슬픔에 빠져서 그동안 해왔던 개혁 정치가 무색해졌고 왕실과 조정을 제대로 이끌어 나가지 못했다. 더욱이 공민왕은 남성을 이성적으로 가까이하는 기이한 모습을 보이며 왕실 성풍속도가 문란해졌다. 시간이 흘러서 공민왕은 그의 호위 무사 부대인 자제위 소속의 "홍윤"(洪倫)과 궁궐의 환관(내시)이었던 "최만생"(崔萬生) 등에게 무참하게 살해를 당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서 "모니노"가 고려의 왕이 되었다. "우왕"(禑王)이다. 시간이 지나고 "최영"(崔瑩)이 앞장서서 중국 대륙의 요동 지역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명나라(明)와 전쟁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 세력이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군대를 이끌고 다시 개경(지금의 개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왕"을 왕의 자리에서 폐위시켰다. 그리고 이성계의 세력들은 "우왕"이 공민왕의 친자식이 아니라 과거에 승려 출신의 "신돈"이 우왕의 친아버지라고 주장했다. "우왕"의 뒤를 이어서 고려의 왕이 된 어린 나이의 "창왕"(昌王)도 "신돈"의 핏줄이라고 주장하면서 폐위시켰다. 그리고 "우왕"과 "창왕"은 일반 서인(庶人)으로 신분이 강등(降等)되었고 귀양을 갔다. 오래지나지 않아서 "우왕"과 "창왕"은 유배지에서 처형되어 죽임을 당했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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