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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당쟁 탕평 정치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2. 7. 2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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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사도 세자

조선시대 사도 세자의 아버지는 영조 대왕이고 정조 대왕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선(愃)이다. 자는 윤관(允寬)이고 호는 의재(毅齋)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와 갈등과 대립을 했고 사도세자는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어 서인으로 신분이 강등되었다. 그리고 영조의 어명으로 곡식 저장 뒤주 속에 갇혀서 굶어 죽었다. 이후 영조가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내린 시호가 "사도"(思悼)이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다시 "장헌 세자"(莊獻世子)라고 시호를 바꾸었다. 영조(英祖)는 조선 제21대 왕(1694년~1776년)으로 이름은 금(昑)이고 자는 광숙(光叔)이며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탕평책(蕩平策)을 쓰면서 당쟁을 조화롭게 하려고 힘썼고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했으며 신문고(申聞鼓)를 부활시켰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등의 책을 펴내는 정책도 장려하였다. 정조(正祖)는 조선의 제22대 왕(1752년~1800년)으로 이름은 산(祘)이고 자는 형운(亨運)이며 호는 홍재(弘齋)이다. 그리고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탕평책을 써서 인재를 고루 등용했고 실학을 크게 발전시켜 조선 후기에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당시에 수원화성을 건설하기도 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1755년 을해옥사(乙亥獄事) 사건을 계기로 소론 세력 내에 과격파의 잔당 세력이 제거되었다. 소론 세력들은 스스로 조태구, 이광좌 등이 영조에게 임금과 신하 사이에서 자신들이 불충(不忠)을 저질렀더고 죄를 청하며 자기들의 당론의 잘못을 뉘우치는 상소를 올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노론 세력의 대의 명분이 이기게 되었다. 이러한 명분을 신임의리(辛壬義理)라고 부르며 이후에 노론 세력이 조정에서 중앙 권력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대의 명분이 되었다. 그리고 "천의소감"(闡義昭鑑)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림으로써 추진력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노론 집권 세력 사이에서도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1749년 이후 대리청정을 해온 왕세자(후일의 사도세자)를 둘러싸고 신하들이 불만을 가졌다. 세자가 신임 의리 명분을 제대로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비판하는 김상로(金尙魯), 홍계희(洪啓禧) 등과 세자를 보호하려는 홍봉한 등의 외가 친척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죽고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대를 이어 왕비가 되면서 그녀의 친정 아버지인 김한구를 중심으로 한 척신 세력(戚臣政治勢力)이 등장했고 분열에 동참했다. 소론 세력과 남인 세력의 일부가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정치 세력으로 키우고자 했다. 1762년에 영조가 자신의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곡식 저장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든 임오화변(壬午禍變) 사건을 일으킨 것은 이러한 정치적인 당쟁 갈등 때문이었다. 영조의 왕권은 점차 왕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외가 친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임오화변(壬午禍變) 사건 이후의 정치 상황에서도 탕평책이 여전히 널리 시행되었지만 현실은 홍봉한과 김한구를 각기 대표로 하는 두 갈래의 외가 친척들이 정치 세력이 되었고 노론 세력, 소론 세력, 남인 세력, 북인 세력들은 서로의 이해 관계를에 따라서 세력 정치를 하고 있었다. 영조의 어머니는 천한 신분이기에 이러한 점이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형인 경종(景宗)이 독으로 살해를 당했다는 혐의도 있었고 영조가 숙종(肅宗)의 아들이 아니라는 세간의 소문에도 시달렸다. 그리고 무신(武臣)들이 영조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반란까지 일으켰다. 영조는 자신의 아들인 사도 세자를 굶겨서 죽여가면서까지 조화롭게 신하들의 당쟁을 이끌어 나가려고 노력했다.

*본인 작성, NAVER 국어사전, 지식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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