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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선조 평가하다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1. 5. 15.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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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류성룡

조선시대 선조(宣祖) 임금(왕)은 재위 기간 1567∼1608년 동안에 암흑의 시대를 살아온것으로 유명하다. 선조 시절 그는 죄 없는 선비들을 수 없이 죽였다. 당시 신하들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어서 붕당(朋黨)을 형성해서 서로 싸웠다. 여기서 붕당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정치 형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당시 조선시대는 왕조 국가(王趙國家)로서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였다. 다시 말해서 군주(君主, 왕)의 권력이 곧 "법"(法)인 세상이었다. 왕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움직이는 세상이었기에 오늘날의 민주주의(民主主義) 제도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主權)이 국민(國民)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制度, system)이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조선시대 선조 임금시절에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형성된 붕당 체제는 오늘날의 국회(國會)에서 정치를 하는 민주당(民主黨), 자유당(自由黨) 이런 정당체제와는 전혀 다르다. 전혀 성격이 틀리다. 아무튼 당시 동인(東人)은 이산해(李山海), 류성룡(柳成龍)이 이끌었고 서인(西人)은 정철(鄭澈), 윤두수(尹斗壽)가 이끌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 역모 사건을 계기로 서인은 동인을 강하게 공격했고 선조의 어명(御命)으로 동인에 속한 수많은 사대부 양반 선비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부른다. 이를 계기로 동인 무리들은 그 영향력을 크게 상실했고 서인이 정권을 대거 장악했다. 여기서 넘겨짚고 넘어갈 점은 선조가 서인 정치 세력을 앞세워서 동인 세력을 힘으로 눌러서 견제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일본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흘러갔고 그 움직임과 분위기를 알고자 했던 선조는 여러 신하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1590년 일본에 사신(使神)으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보내게 된다. 당시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을 보냈는데 사태 파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돌아오자 조선 조정은 전쟁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큰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은 1592년 일본 본국에서 왜구(倭寇, 일본 해적)가 아니라 일본 본토의 정규군인 왜군(倭軍)이 조선에 쳐들어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한반도에서 전쟁(戰爭)이 이어진다. 임진왜란은 1592년에서 1598년까지 계속되었는데 7년의 전쟁 기간 동안에 일본은 바다로 배를 타고 한반도를 건너왔고 부산 지역을 시작으로 한양(漢陽, 지금의 서울)까지 거침없이 치고 올라왔다. 선조는 자신의 아들 중에서 광해군(光海君)을 세자(世子)로 삼고 분조(分朝)를 세워서 왜군에 침략에 대비토록 했다. 광해군은 분조를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며 조선의 정규군과 의병을 지휘하며 큰 전공을 여러번 세웠다. 이러한 점을 경계한 선조의 어심이 불편했고 이를 알고 광해군은 스스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선조가 계신 곳을 향해서 자신의 머리 이마를 땅에 치며 여러번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했다고 한다. 선조는 일부 신하들을 이끌고 한반도를 북상하는 왜군을 피해서 북으로 피난을 갔다. 당시에 조선 정규군과 더불어서 뜻있는 백성들이 스스로 뭉쳐서 의병(義兵)이라는 군대를 조직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런데 선조는 이러한 의병들도 경계하였다. 의병은 자신의 어명으로 움직이는 국가의 정규군도 아니었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많은 수의 병사들이었기에 전쟁이 끝나고 나면은 자칫 반란(叛亂)이라도 일으킬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한반도 남쪽 바다 해안 지역에서는 수군(水軍, 지금의 해군)을 이끌던 이순신(李舜臣)도 선조의 경계 대상이었다. 당시에 이순신은 해전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어서 백성들의 인심을 얻었고 군사들이 사기가 높았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과거 제도 무관 시험을 실시하여 관리들을 뽑아서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켰다.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무과 시험인 과거(科擧) 제도라는 것이 성격상 국가에서 문무 관리를 뽑는 제도서 관리를 뽑는 과거 제도는 조선 국왕(國王)의 어명(御命)으로 중앙 조정에서 하는 일인데 일개의 지역 군대 사령부 지방관 "장수"(將帥)라는 사람자신 임금도 아니면서 이순신 개인 스스로 즉결 판단으로 무과 과거 제도를 시행했으니 선조는 이순신이 잘못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조정 관리들이 이순신이 죄를 지었다고 모함을 했고 결국 이순신은 임진왜란 전쟁 중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히고 만다. 그리고 얼마 후에 선조는 죄를 사면(赦免)하고 이순신을 전쟁터에 다시 돌려보낸다. 선조는 나라의 안위도 신경썼지만 자신왕위와 왕권을 굳건히 지키고 백성들의 신망을 독차지 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 군주(君主)이다.

*본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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