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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그리고 인조 반정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2. 7. 3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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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光海君)은 조선 제15대 왕(1575년~1641년)으로 이름은 혼(琿)이다. 각종 서적을 편찬했고 고려 말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전해져 내려온 실록 등 국가의 중요한 서적을 보관하던 서고(書庫)를 정리하는 등 나라 안을 다스리는데에 힘썼다. 그리고 명나라(明)와 후금(後金) 두 나라 사이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며 위급에 처한 나라를 지켜나가려 애썼다. 말년에 당쟁 겪으며 자신의 형인 임해군(臨海君)과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죽였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궁궐 깊숙히 가두었다. 이후에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인조(仁祖)는 조선의 제16대 왕(1595년~1649년)으로 이름은 종(倧)이고 자는 화백(和伯)이며 호는 송창(松窓)이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재위 기간 동안에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었고 새로운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광해군은 세자 책봉 문제로 임해군과 갈등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버지인 선조(宣祖)가 평양(平壤)에서 광해군을 세자(世子)로 책봉(冊封)을 했다. 선조와 광해군이 함께 의주(宜州)로 피난(避難) 길을 가던 중에 영변(寧邊) 지역에서 가는 길이 나누어져 갈라졌다. 광해군은 권섭국사(權攝國事)의 직위를 맡고 분조(分朝)의 책임자가 되어 평안도 지역으로 갔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등의 지역에 오가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왜군(倭軍)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 활동을 진행했다. 1597년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도와 경상도로 내려가서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를 조달하는데 역할을 했고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이 대북파(북인, 北人)의 지지를 받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1613년 대북파의 건의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신분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1618년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인 신분이 된 영창대군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서궁(西宮)에 가두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행위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광해군은 서인들이 일으킨 반정(反正)으로 왕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당시에 한반도 이북 만주 지역에서는 여진족(女眞族)이 새롭게 일어난 국가로 빠르게 성장하여 후금(後金)이라는 나라를 건국했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려 했다. 광해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다. 1623년에 반정을 일으킨 이들은 김류(金瑬), 김자점(金自點),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의 서인(西人) 세력이었다. 1623년 에 인조가 왕이 되었고 1624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자 인조는 충청남도 공주(公州)로 피난을 갔다. 도원수 장만(張晩)이 반란을 진압하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인조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을 내세웠다. 1627년에 후금이 군사적으로 공격해오자 후금과 조선은 형과 아우 사이로서 의형제의 조약을 맺었다. 이 사건이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선 조정에서 친명적(親明的)인 태도를 보이자 1636년 국호(國號)를 청나라(淸)로 고친 태종이 이점을 빌미 삼아서 10만 대군으로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왔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서로 싸우다가 조선이 패배하여 청나라 군대(淸軍)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의형제 사이에서 임금과 신하 사이로서 군신(君臣) 관계의 조약를 맺었다. 이어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이 사건이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 이후 집권당인 서인은 공서(功西), 청서(淸西)로 나누어져서 분열되어 싸웠다. 1645년 볼모 생활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죽게 되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논란이 일어났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에는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에게 사약(死藥)을 내려 죽게 하였다.

*본인 작성, NAVER 표준국어대사전, 두산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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