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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이념 천도교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3. 2. 27.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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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전쟁은 역사적으로 보았을때 세계적으로도 아주  지속적으로 자주 일어났던 사건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어난 농민운동은 내전(內戰)으로 이어져서 기존의 나라를 멸망을 시켰고 새로운 나라들을 탄생하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별다를것이 없다. 동학농민운동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말기 한반도의 대혼란기였다. 동학 농민 운동은 서기 1894년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김기범, 손화중, 김개남 등의 동학 지도자들이 고부 지역 군수였던 조병갑의 횡포에 대항하여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지배층의 제거와 백성들의 평화로운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갑오년에 발생한 이 농민 운동은 주변 지역에 급속도로 전해져서 수 많은 농민들이 너도 나도 동참하여 그 규모가 커졌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처음에는 지역적인 민란(民亂)의 성격이었으나 이후에는 확산되는 과정에서 지역적인 봉기(蜂起) 보다는 외국 세력의 침략(侵略)을 물리치고 봉건주의(封建主義)를 무너뜨리려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서 최종적으로 사회 구조의 잘못된 점을 개혁(改革)하고자 하는 이념 정신을 내새우며 활동하게 되었다. 동학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민란으로 동학 농민 운동은 동학 농민 전쟁, 갑오 농민 전쟁, 동학란(東學亂)이라고도 부른다. 마지막에는 조선 관군(官軍)과 일본군의 연합부대에게 진압되었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의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바탕으로 한다.  당시 조선 왕실에서는 반란(叛亂)으로 여겼다. 동학의 근본적인 발생 원인은 1893년 충청북도 보은 집회에서 시작되었다. 남접(南接) 지부 단체와 북접(北接) 지부 단체 모두가 참가하여 그 규모가 컸으며 충청도 보은 출신의 어윤중이 선무사로 파견되어야 했던 집회였다. 서장옥, 전봉준도 집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보은에서 집회가 끝나고도 정치적으로 열성적이었던 백성들은 전라도 금구 지역에서 집회에서도 큰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이유는 전라도 지역의 백성들이 지배층으로부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3년 3월 11일자에 나온 보은 집회의 1차 통유문은 교조 신원과 사회 개혁을 위주로 하여 작성되었으나 1893년 3월 16일에 2차로 나온 통유문은 서양 세력과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는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뜻이 담긴 보국안민(輔國安民) 정신을 내세웠다. 전봉준은 무장 봉기를 계획하게 되었고 주변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무장 접주 손화중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손화중은 이를 거절하였다. 당시의 봉기군의 계획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조병갑을 처형하자"였고 "전주 성곽을 점령하고 한양으로 진출하자"는 계획이었다. 이것이 1968년 발견된 사발통문이었다. 이들은 농기구를 들고 대나무를 깎아서 만든 죽창으로 무장하여 나섰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선 조정은 동학군과 조약을 맺어서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이 모두 세력이 물러가기를 원했지만 상황이 안정되자 이번에는 일본군이 갑신정변 이후 다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기에 조선 조정에서 일본이 군대를 거두라고 철군 요구를 했지만 일본군은 이 요청을 거절하고 조선에 주둔시켰다. 동학농민군과 우금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되었다. 이후 더 이상 일어날 지휘부가 없어지자 동학 농민군의 마지막 남은 세력들은 동학의 접주급 이상 지도자 25명이 마지막 항쟁을 결의하고 대둔산으로 옮겨 가서  산세가 험난한 정상 지역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고 대비했다. 험준한 바위와 산 봉우리로 이루어진 대둔산 산세를 보고 접근하여 조방장(助防將), 김학립(金鶴立)으로 하여금 미륵 바위 서남쪽 100m 떨어진 계곡 너머 능선에서 몇 차례 사격을 하고 물리치자 동학농민군은 진산으로 철수했다. 일부 살아남은 세력들은 조선 관군에 체포되어 잡혀가서 죽임을 당했고 다른 동학 세력은 일제강점기 기간 동안에 국내에서 천도교에 소속되어 내부 결속을 다지며 일제의 탄압에 항거했다. 나머지 동학 세력들은 중국 동북 지역으로 이주해서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동학 이념 정신이 민족 종교로 발전하여 천도교(天道敎)가 탄생였는데 국내에서 남아있던 동학 지도부가 중심이 되어 이끌었다. 그리고 일제 탄압에 항거하는 모임의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1898년 4월 5일에 교주였던 최시형이 조선 관군에 붙잡혀서 1898년 6월 2일에 순교한 뒤에 손병희는 사태를 수습하고 조직을 재정비하는데 힘썼다. 그러나 탄압이 심해지자 1901년 3월에 일본으로 옮겨갔고 1901년 9월에 일시적으로 조선으로 돌아왔다가 1902년 3월에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손병희는 교정일치론(敎政一致論)을 철회하고 정치적으로 나서지 않기로 했으며 종교로서의 동학이 역할을 하기로 하고 이끌어갔다. 1905년 12월 1일에 동학을 천도교로 세상에 널리 알리고 1906년 1월에 조선으로 돌아와서 교회를 재조직하는데에 힘썼다.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새로운 교단조직을 만들었다. 서울에 중앙총본부를 두고 대도주(大道主)가 다스렸으며 지방은 72개 대교구로 분할했고 교령(敎領)이 관할하게 하였다. 1910년부터 포교활동과 더불어 출판교육 등의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1934년에는 조선독립만세운동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천도교 오심당 사건이 일어나서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1937년에는 천도교 청우당이 해체당하는 등 일제의 탄압이 이어졌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 백과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나무위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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