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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전쟁-메카 메디나 전쟁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4. 12. 16.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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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crusades, Expeditio Sacra, 十字軍戰爭) - 1095년부터 1291년에 걸쳐 지금의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발생한 유럽 기독교 국교(國敎) 국가들의 이슬람 원정 전쟁이 십자군 전쟁이다. 시대가 지나서 사학자들은 크루치아테(Cruciatae)라고 불렀고 오늘날의 영어로 크루세이드(Crusades)라고 해석한다. 이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이 자신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가지고 전쟁을 했다고 해서 십자군 전쟁이라고 부른 것이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부 지역 유럽의 예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聖地)인 팔레스티나와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빼앗기 위해서 8번에 가까이 시도한 원정 전쟁이다. 이 전쟁에 참여한 군사를 십자군(十字軍)이다. 당시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다. 십자군의 참전이 종교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고 세상에 신은 예수 밖에 없다고 믿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충돌이기에 종교 전쟁으로도 해석한다. 그러나 단순히 종교 전쟁이 아니라 유럽 내부의 사회 분위기에서 봉건주의 지배 세력인 영주와 하급 기사들이 새로운 영토 지배 욕구가 있었고 상인(商人)들은 보다 넓은 세상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 참여했고 농민(農民)들은 봉건주의 사회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원정 전쟁에 참전하였다. 여기에는 호기심과 모험심, 약탈 욕구 등이 더해졌다고도 해석한다. 십자군 전쟁 시기에 서부 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노르만인의 이탈리아 남부 지역과 시칠리아 지역 정복, 에스파냐(스페인)의 국토 회복 운동, 독일의 동부 지역에서 재배 세력 활동 등이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 식민적 운동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종교 전쟁으로 이어졌다. 1071년 동로마 제국 황제 로마노스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이슬람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크게 패배를 당했고 동로마 제국은 기존 핵심 지역이던 아나톨리아 지역의 대부분을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겼다. 1081년 새로운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자 이를 수습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남부 지역의 노르만족, 북부 지방의 페체네그족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제국 등 상대할 적들이 많아서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동로마 제국은 1095년 3월에 피아첸차 지역에서 열린 공의회에도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피아첸차에서 이들을 접견한 카톨릭교 지도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이교도들에게 맞설 원군을 보내달라" 정도의 내용의 요청을 듣고는 본격적으로 십자군을 위한 여론 조성에 나섰다. 이후에 1095년 11월의 클레르몽 공의회를 기점으로 서유럽은 약 200년 가까이 유럽에서 십자군을 파견하여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치르었다.
 
중동 메카 메디나 지역 이슬람교 주도권 전쟁 - 메카(Makkah Al Mukarrammah)는 과거에 히자즈로 알려졌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로 메카주의 주요 도시이다. 메디나 지역과 함께 이슬람 역사에서 중요한 도시이다. 이슬람교를 믿는 모든 무슬림은 가능하면은 살아있을 동안에 한 번 이상은 메카 순례를 떠나는 것이 의무로 여긴다. 메카의 순례 행사는 이슬람력 마지막 달인 두알히자(순례의 달)에 시작되며 이 순례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하즈, 참례자를 하지라고 부른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에 하즈가 들어있기 때문에 메카는 늘 순례자로 붐빌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이 때문에 메카라는 말은 단순히 도시의 지명을 넘어서 어떤 집단의 아주 중요한 장소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1980년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공식 표기를 "메카"에서 "마카"로 변경했는데 메카는 무함마드의 출생지이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3.2 km 정도 떨어진 히라 동굴에서 쿠란에 대한 첫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슬람 전승에서는 이스마엘의 정착이 메카의 시초라고 한다. 기원전 60년에서 기원전 30년 무렵의 역사를 기록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당시에 이미 카바를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 사마리아인들은 메카가 이스마엘의 장남 느바욧에 의해 세워졌다고 여겼다. 서기 570년 메카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났다.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610년 메카 인근의 자발 알노우르(빛의 산)에 있는 히라 동굴에서 대천사(大天士) 가브리엘로부터 첫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에 무함마드(이슬람교 창시자)는 다신교도(多神敎徒, 셀 수 없이 수 많은 신을 믿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알라"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성스러운 신이라고 이슬람교를 믿으라고 전파하다가 반대파의 억압과 박해를 받았고 서기 622년에 메디나 지역오로 이동했다. 이후에 무슬림과 다신교 사이의 분쟁이 계속되었고 결국에는 중동의 메카 세력과 메디나 세력이 전쟁을 치르었다. 이 전쟁에서 메디나 지역의 세력이 승리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다신교를 믿고 있던 메카 지역에 메디나의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무함마드의 헤지라 이전엔 '야스리브'라 불렸고 헤지라 이후에는 '예언자의 도시'라고 불리게 되어 이것이 일반적으로 '도시'를 의미하는 메디나로 생략되었다. 그 외에도 빛의 도시, 신의 사자(使者)의 도시 등으로도 불린다.사회의 구성은 메카보다 복잡하여 아랍족으로서 카브라지족과 아우스족이 있었고 그 외에 3종족으로 나뉜 유대교도가 있었다. 무함마드의 '헤지라'에 앞서 아우스족 대부분과 카즈라지족 일부가 서로 싸웠으므로 무함마드는 이 분쟁에 대한 조정자로서 또한 예언자로서 메디나에 초빙되어 이 두 종족을 이슬람의 결합 원리에 의하여 통일하고 연합시켰다. 이 연합은 불안정한 것이었으나 마호메트 군대의 메카 약탈에 의하여 메디나 경제가 윤택해져서 이슬람을 지지하게 되었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 위키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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