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의 수장(首長)인 교황은 유럽 대륙의 이탈리아에 있는 교황령에서 거주하고 있다. 교황령은 독립된 하나의 국가(國家)이다. 교황령을 지키는 군대도 있다. 우리나라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교황을 교화황(敎化皇), 법왕(法王), 법황(法皇), 로마 법왕(Roma 法王) 등으로 등록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처음에는 "백성을 하느님에게 이끌어 감화시키는 자"라는 의미에서 교화황(敎化皇)이라고 불렀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모든 교리를 세상에서 주관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주교자(主敎者)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교화황을 줄인 교황과 교종을 같이 사용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교황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면서 "교황" 표현만 쓰게 되었다. 1992년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춘계총회에서 용어위원회 논의를 거쳐서 교황이 공식 용어로 최종적으로 확정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교황을 "로마 법왕"이라고 부른다. 최근에 교황이라는 호칭이 황제나 군주를 연상시켜서 지나치게 권위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2013년 3월 21일 명동성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경축 미사 의식을 집전한 강우일 베드로 주교(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는 강론에서 교황 대신 교종(敎宗)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이 주어진 분의 복음적 영혼과 삶을 드러내는데 임금(왕, 王)과 황제(黃帝)를 표현하는 교황(敎黃)이라는 어휘가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기에 미사 의식에서 교종이 불렀다고 이유를 밝혔다. 강우일 주교는 1990년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전례위원장 시절부터 교황의 호칭을 교종으로 교체하는 것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강우일 주교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대한민국을 방문했을 때에도 다시 한번 교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교종(敎宗)은 중국, 대만 등 중화권에서도 교황 대신에 쓰는 표현이며 일본에서는 교황(教皇)과 로마 법왕(ローマ法王)이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근대의 메이지 유신부터 2010년대까지 일본 정부의 대내외(對內外)에 발표하는 공식 문서와 NHK(일본방송협회), 요미우리 신문 등 일본 주요 언론들에서 "로마 법왕"이라고 불렀으며 일본 가톨릭 단체에서는 1981년 2월에 요한 바오로 2세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부터 "교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일본(日本)에서 교황(敎黃)을 처음에는 법왕(法王)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라틴어에서 한문(漢文)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법왕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일본 사회에서 뿌리 깊은 종교인 불교의 관점에서 "부처님"처럼 "교황"도 종교계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를 가져다가 쓰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처음에는 교황(敎黃)을 법왕(法王)이라고 불렀다. 일본에서 지어낸 교황이라는 명칭을 달리 해석해보면은 "종교계의 황제"라는 뜻이다. 그리고 교황이라는 명칭은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단어이다. 교황령은 유럽의 중세 시대 초기부터 근대까지 가톨릭교(Catholic)의 수장인 교황이 다스리던 영지로 교황국, 교회국, 교회령(敎會領), 베드로 세습령(世襲領, Patrimonium Petri)이라고도 부른다. 동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여 성립되었고 이탈리아 통일로 멸망하였다. 국가 성격상 현재 바티칸 시국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영토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위치해 있었으며 아비뇽 유수부터 프랑스 혁명까지는 아비뇽 지역도 교황령이었다. 기독교(基督敎, Christianity)가 로마 제국에서 정식으로 공식 종교로 공인되기 전까지 교회(敎會, Christian Church )는 예수(Jesus)가 박해(迫害)를 받으면서 지하(地下) 땅굴 속에서 숨어서 살면사 종교활동을 유지하였고 전도(傳道)하는 상태라서 공식적으로 재산을 보유하거나 양도할 수 없었다. 서기 321년에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으로 교회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였고 신앙심이 깊은 부자들의 기부를 통해서 교회의 사유 재산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라테라노 궁전을 교황에게 기증하였고 옛 성 베드로 대성당도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증하였다. 서기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였고 서기 533년에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반도 영토를 되찾으면서 세운 "로마 공령" 은 교황령의 기반이 되었다. 이탈리아 영토를 되찾았지만 서기 568년에 랑고바르드족의 공격으로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영역은 로마 도시와 라벤나를 포함한 중부 지방 그리고 남쪽의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지역으로 정해졌다. 이에 따라서 로마 시와 주변을 포함하는 라치오 지역에 라벤나 총독부 휘하의 로마 공령(Ducatus Romanus)이 설치되면서 교황령 영토의 기초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러한 이탈리아에 서기 584년에 라벤나 총독부를 세우고 라벤나에 총독을 파견하여 로마 공령과 베네치아 공화국, 풀리아, 칼라브리아를 통치했다. 서기 751년에 라벤나 총독부가 결국 랑고바르드 왕국에 의해 함락당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로마와 주변 지역을 지배할만한 세력과 수단을 상실했다.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중립을 선언하면서 비밀리에 프랑크 왕국의 황제 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피핀 3세는 754년과 756년에 프랑크군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진출하여 이탈리아 북부의 랑고바르드족을 무찌르고 교황에게 옛 라벤나 총독부의 영토를 댓가를 받지 않고 기증하였다. 서기 774년에 피핀 3세의 아들 카롤루스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 북부를 정복하면서 교황령도 프랑크 왕국에 속하는 영토가 되었다. 서기 843년에 베르됭 조약으로 교황령은 북부 이탈리아와 함께 중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서기 855년에 프륌 조약으로 중프랑크 왕국에서 북이탈리아가 이탈리아 왕국으로 나누어졌다가 서기 962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 영토에 속하게 되면서 교황령 역시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는 영토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보유한 통치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자 1177년에 베네치아 조약으로 라치오 지역 부근은 이탈리아 왕국에서 독립하였고 로마냐 등의 지역은 교황령과 신성 로마 제국이 함께 통치하다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 황제 루돌프 1세가 교황에게 통치권을 전부 돌려주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교황령은 여러 봉신국(封臣國, vassal state)들을 다시 정복한 후 통합하여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18세기 후반인 1791년까지 교황령이었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교황청이 이 사건을 크게 반대하였다. 그러자 1798년에 프랑스가 군대를 보내서 아비뇽 지역의 교황령을 점령하였고 수도 로마까지 침략하여 교황령을 최초로 폐지하였다. 1849년에 주세페 마치니 등 이탈리아 통일론자들이 혁명운동을 하며 다시 교황령을 폐지했고 새로운 로마 공화국을 세웠다. 많은 영토를 잃어버린 로마 교황들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그 주변의 좁은 공간 안에서 고립되어 대를 이어가며 바티칸(교황령, Vatican City State)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는 자주 충돌하였는데 교황령의 수도인 로마의 전통적인 귀족 가문인 검은 귀족들이 교황을 지지하고 이탈리아 조정에 대항하여 이탈리아의 영토 통일에 큰 장애가 되었다. 1929년에 교황 비오 11세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면서 오늘날의 바티칸 교황령 영토가 확정이 되었다.
*본인 작성, NAVER 검색, 나무위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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