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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임나일본부설

상고시대 고조선-부여시대

by 느낌 . 2015. 4. 22.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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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정부의 우경화(右傾化) 세력을 대표하는 일부 역사학계에서 주장하는 대한민국 가야

(伽倻)에 대한 억지스러운 주장해왔다. "가야"라는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자면

"가야"는 고대시대 삼국시대로 나뉘기 이전에는 그리 큰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고 "신라"

(新羅)와 하나의 나라로 합쳐진 세력의 나라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신라 유리왕 19년(42년)

에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12부족의 연맹체로서 통합하여 부르는 나라로서 김수로왕의 형제

들이 세운 여섯 나라였다. "금관가야"(金官伽倻)가 여섯 가야의 리더(leader)이자 대표였고

562년에 대가야(大伽倻)를 마지막으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은

일본 정부의 우경화 세력을 대표하는 일부 역사학계에서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

府說)에 대해서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 왜"(大和倭) 정부가 4세기 후반에 한반

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백제. 신라. 가야를 "왜"(倭, 지금의 일본)이

지배했고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의 용어에 대해서 다시 정리하여 말하자면은 "임나"(任那) 또는

"가야"의 다른 이름인데 "일본부(日本府)는 말 그대로 일본 정부의 국가 기관을 뜻한다.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이 나오게 된 계기는 한반도 이북 만주 지방 중국 지린 성 지안 시 퉁거우에 있

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고구려 장수왕이 그의 아버지 광개토대와의 업적을 적어

새겨 만든 비석)의 기록에서 "임나 일본부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다. "플러스

코리아 타임즈"(http://www.pluskorea.net/)에 실린 기사를 잠시 참고하여 말하자면은 광개토

대왕릉 근처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져 적혀져 있는 기록 중에서 비문 내용 중에

"신묘년조"라는 글이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 많고 많은 구절 중에서.. 영락 6년(396년). "倭以辛

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하신민)이라는 글귀

가 적혀져 있는데 여기에서 글자가 훼손되어 해석하기 어려운 "□□" 부분을 제외하고 한자로

써져 있는 글을 대강 해석하자면은 <"왜"(당시의 일본)가 신묘년(그 당시의 연도)에 바다를 건

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정벌하고 백성들을 "왜"의 신민(자국의 나라 백성)으로 삼았다>고 해

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당시의 "왜"가 고대시대 한반도

의 가야를 지배를 했다는 설이다. 1882년도에 발견된 이 비석은 일본 역사학자 "요코이 다다나오"

이다. 그는 탁본을 해서 만든 문서인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하여 이 비문 내용을

공개함으로 세상에 알렸다. 이후에 이 기사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4세기 후반 진구 황후(신공

황후, 神功皇后)가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을 입증해주는 증거로 제시했으며 그 후에는 "임나일본

부설"로 논쟁거리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일부 우경화 세력 일본 학자들이 말하기를 이 문제의

기록 내용들이 앞서 밝힌 "임나일본부설"의 증명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2010년 3월

에 "한국 일본 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를 하고 서로 논의를 한 결과에 따라서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이 아니며 용어 자체를 폐기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 정

부는 자신의 나라에 만든 역사교과서에 자국의 역사학계의 우려를 무시한채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이 당시 가야는 당시 "왜"나라에 철제 갑옷

같은 철로 무기를 갑옷과 "칼"과 같은 철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선진 금속 기술과 문화를 전파

하며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교류를 했다는 정도의 기록과 역사 유물과 유적이 남아있는것이

전부이고 광개토대왕릉 비석에 나와있는 내용 중에는 백제(百濟)의 아신왕(阿莘王)이 왜(倭)에

군사(軍士)를 요청해서 신라 영토를 공격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라가 고구려 사신을 보내

서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을 했고 그러자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군사 보병 기병 5만명을 보내서

신라 영토에서 왜군(倭軍)을 물리치고 가야(伽倻) 영토까지 정복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을 뿐이다.

일본 정부가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에게 역사적인 내용을 속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인터넷판 플러스 코리아 타임즈 신문 기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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