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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伽倻 역사 평가

상고시대 고조선-부여시대

by 느낌 . 2017. 4. 16.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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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료가 너무나도 협소하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가야"(伽倻, 伽耶, 加耶)의 역사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자 한다. "가야"(伽倻)의 건국 신화(建國神話)는 시조(처음 조상)에 대해서 하늘을 나는 새가 낳는 "알"과 같은 물체로서 태어났다고 표현한다. 옛 노래(향가, 鄕歌) 중에는 "구지가"(龜旨歌)가 있다. 노래 내용은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머리를 내어 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이다. "구지가"는 구지봉(龜旨峯) 주위에 살던 구간(九干)과 그 백성들이 수로왕(首露王)을 맞기 위해서 부른 고대 가요이다. 고려시대에 일연(一然) 스님이 지은 건국 신화를 적은 책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 내용이 실려있다. 간단히 정리해서 말하자면은 포유류에 속한 인간은 아기 때부터 어미로부터 임신 뒤에 몸이 자라서 새끼로 분만되어 낳아서 길러지는데 "신화"에서 말하는 시조(始祖, 처음 나라 조상)의 탄생에 대해서 처음에 알의 형태로서 태어나서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신화(설화)가 지어진 이유는 "신비주의"와 "고귀함", "특별함", 그리고 "일반인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서 "알"에서 "조상"이 태어났다고 건국 신화를 지어내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新羅)의 3대왕 유리왕(儒理王) 때에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12부족의 연맹체를 통합하여 김수로 왕의 형제들이 세운 여섯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금관가야"를 맹주로 하여 6개가 있었는데, 562년에 "대가야"를 마지막으로 신라에 병합되었다. 참고하여 정리해서 말하자면 "수로왕"(金首露)은 "가야"의 시조(?~199)이다. 하늘로부터 김해의 구지봉에 내려와서 6개의 "가야국"을 세웠고 여섯 형제 중의 제일 윗사람이다. 김해 김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재위 기간은 42~199년이다. "가야"의 영토는 한반도의 남해안에 인접한 거제(瀆盧國), 김해(狗邪國), 창원(古淳國, 卓淳國), 함안(安邪國), 고성(古 自國) 등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이후에는 고령(大加耶), 합천(多羅國), 창녕(不斯國, 比斯國), 의령 (爾赦國)·거창(居烈國), 남원(己汶國), 하동(多沙國), 사천(史勿國) 지역에 이르렀다. 서남 아시아에 위치한 오늘날의 "인도"(印度)라는 이름의 국가에는 고대시 대에 갠지스 강 중류에 아유타(阿踰陁)라는 이름의 나라가 있었다. BC 6세기에 번성했던 아유타(阿踰陁)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을 수로왕은 "황후"(皇后)로 받아들였다. 일본 정부의 우경화 세력을 대표하는 일부 역사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한다. 임나 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 왜"(大和倭) 정부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 "신라", "가야"의 일부 지역을 영토로 삼아서 지배했고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관청을 두고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것이다. 1882년도에 오늘날의 중국 영토인 한반도 이북 만주 지방 중국 지린성 지안시 퉁거우 지역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라는 이름의 거대한 비석(碑石)이 발견되었다. 이 비석은 고구려의 "장수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후세에 알려 남기고자 만들어서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에 새겨진 글에서 일본인 학자 "요코이 다다나오"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해서 주장했다. 4세기 후반 일본의 야마타이국 진구황후(신공황후)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벌을 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미 2010년 3월 "한국 일본 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이 아니며 용어 자체를 폐기하기로 합의하였다. 4세기 중후반에 백제(百濟)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지금의 한반도 중북부 황해도 지역 인근의 낙랑 대방군 옛 땅을 두고 고구려와의 경쟁을 벌였고 이를 위해서 가야 및 왜(일본)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전쟁을 대비한 병참기지(兵站基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4세기 말에 들어서서 황해도 지역을 두고 고구려와 백제의 패권 전쟁은 고구려가 이겼다. 그 영향으로 신라(新羅) 의 요청을 받은 고구려군이 낙동강 하류까지 내려와 임나가라(任那加羅)를 급습하였다. 이 정벌로 인하여, 고구려의 군사적인 지원을 받은 신라는 한반도 신라 지역에 침입한 왜의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고 결정적으로 "가야"보다 세력이 커질 수 있게 되었으며, 백제는 가야 지역을 여러 면에서 정치 외교 국방 경제적으로 중개 교류 기지로 하는 왜(일본)를 통한 경제 교역망을 삼고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고구려(高句麗)에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이후 공격을 받고 그 교역망을 잃게 되었다. "가야"는 역사적으로 "왜"(지금의 일본)와 수많은 외교적 문화 교류를 하였다. 그리고 "가야"는 질 좋은 "철"(금속)을 많이 생산하여 군사용을 비롯하여 많은 철 제품도 생산하였다. 가야는 철로 무기를 만드는 기술도 일본에게 가르쳐 주었다.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540~576년) 시절 "대가야"(大加耶) 지역에 월광 태자 "도솔지"가 마지막으로 왕위에 올랐고 그 이후 가야 영토 대부분이 신라의 영토로 복속되었다. 금관가야(金官伽倻) 왕족 출신이자 신라 화랑 출신인 "김유신"(金庾信)은 신라 왕족 출신 "김춘추"(金春秋)를 신라의 29대 왕위에 올리는데 큰 공을 세웠고 "신라"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자료를 참고해서 한마디 더 덮붙이면 "가야"의 건국자들은 한반도 이북에서 내려온 "부여"(夫餘) 출신의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9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대성동 고분군이라는 옛 가야 지배자 무덤이 밀집되어 있는곳이 있다. 이곳에서 "동복"이라고 불리우는 그릇인 솥이 발견되었다. 동복은 북방의 유목 민족이 쓰는 솥이다. 그밖에 달리는 동물인 "말"(馬)을 꾸미는 장신구와 관련된 유물이 대거 발굴되고 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부여"의 전통인 죽은 사람 시체 매장(埋葬) 방식인 순장(殉葬)이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 결과 발견되었다. "순장"은 한 집단의 지배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뒤를 따라 강제로
죽여서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과 함께 땅 속에 묻는것을 가리키는 말한다. 보통 왕이나 귀족 등이 죽으면 하인, 신하 등을 함께 묻었다. 많을 때는 백명 이상 되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짐작하자면 옛 가야의 지배자들 중에는 동북아시아 지방에서 한반도로 내려온 부여(夫餘) 출신 사람들이 이주해서 구성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인 작성. 여러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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