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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百濟 역사 평가

고대시대 백제-고구려시대

by 느낌 . 2016. 12. 2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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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라는 나라를 세운 "고주몽"은 "북부여"(北夫餘) 출신의 사람이다. 고주몽은 성장해서 자신의 고향인 "북부여"를 떠났고"졸본 부여"(卒本扶餘) 지역에서 그 지역 세력가 딸이었던 "소서노"(召西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고구려"(高句麗)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웠다. 소서노는 고주몽과 결혼을 하면서 "혼인 동맹"(婚姻同盟)을 맺었다. 당시에 소서노는 이미 아들이 두 명이 있었다.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이다. 소서노가 고주몽과 결혼하기 이전에 이미 아들 2명을 데리고 있었다는 것은 소서노가 이미 한번은 결혼을 했다는것으로 볼 수 있고 그 결혼생활을 이혼하고 아들 두명을 그대로 자신이 키우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주몽과 소서노의 혼인 동맹 내용은 고주몽이 죽고 난 뒤에 뒤를 이어서 소서노의 아들 중의 한명을 왕으로 정하자는 내용이었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고 고주몽이 북부여에 두고 온 자신의 부인과 아들이 부러진 칼을 가지고 찾아왔다. 고주몽은 자신도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의 일부를 서로 맞추어 보고 확인 뒤 그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찾아온 아들을 자신의 뒤를 이을 태자로 정했다. 상황이 이러하자 "고주몽"의 또 다른 부인인 "소서노"는 "고주몽"과 혼인 동맹"(婚姻同盟)을 깨고 자신의 두 아들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데리고 그녀를 따르는 부여 고구려 세력과 함께 한반도(韓半島)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에 나라를 세웠고 "온조"는 한성(漢城)에 나라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서 지금의 서울 지역인 "한성"(漢城)과 "위례성"(慰禮城) 지방에서 "백제"(百濟)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국가를 세웠다. 백제의 처음 시조(始祖)이자 맨처음 왕은 태조 "온조"(溫祚)이다. 온조(溫祚)의 자손 왕족과 비류(沸流)의 자손 왕족이 번갈아가면서 백제(百濟)의 왕이 되었다. 백제의 시조(?~28)이자 제1대 태조 온조왕(溫祚王)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11년에 말갈(靺鞨)의 침입을 받았으며, 기원전 5년에 서울을 남한산으로 옮기고 9년에는 마한을 병합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18~기원후 서기 28년이다. 제8대 왕인 고이왕(古爾王, ?~286) 시절에는 율령(律令, 법)을 확립하고 관제를 제정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신라의 변방을 침범하여 영토를 넓혔으며 국가의 기초를 세웠다. 제12대왕인 계왕(契王)은 고이왕계의 마지막 백제왕이었다. 백제는 제13대 왕이었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마한(馬韓) 54개 부족 국가와 가야(伽倻) 7국을 정벌하여 백제의 영토로 만들었다. 중국의 요서(遼西) 지역 일대를 서해(西海, 황해) 바다를 건너가서 전쟁을 했다. 그 증거가 중국의 여러 역사책인 중국 25사(史)에 나온다. 중국 25사(史)중에서 "송서"(宋書), "양서", "남제서"(南齊書), "자치통감"(資治通鑑), "통전"(通典)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가 요동(遼東) 지역을 차지하자 백제는 서해(西海)바다 건너 요서(遼西) 지역과 진평 이군 성곽 지역을 백제 영토로 만들었다"고 기록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활동했던 유학자(儒學者) 고려시대 김부식이 남긴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 46권 열전 최치원 인물 편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에 강병이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주와 연나라, 제나라, 노나라를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좀이 되었습니다(高麗·百濟 全盛之時强兵百萬 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왕국으로 갈갈이 찢겨서 소국(小國)으로 나누어져서 존재하고 있던 왜(倭, 지금의 일본)와 수 많은 문화 교류를 하였다. 그리고 근초고왕은 "왜"에 "칠지도"(七枝刀)라는 일곱 가지 모양의 "칼"을 하사하였는데 칠지도에 새겨진 글씨의 내용은 "태○ 4년 11월 16일 병오정양에 100번이나 단련된 철로 된 칠지도를 만들었다. 모든 병해를 피할 수 있으니 마땅히 후왕에게 줄 만 하다. ○○○○이 만들었다. 선세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으니 백제 왕세자 奇生聖音 고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고 칼에 새겨져 있다. 칠지도는 백제가 제작하여 제후왕(諸侯王)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하였고, 371년에는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하게 하였다. 이를 통하여 백제는 강력한 고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유학자인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을 일본에 파견하였으 박사 고흥(高興)에게 백제 역사책인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하였다.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시절에는 인도의 승려인 "마라난타가 중국 동진(東晉)에서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 불교를 전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백성의 사상을 통합하였다.


제17대 아신왕(阿莘王) 시절은 공교롭게도 "고구려"에서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91~412)가 고구려를 다스리던 시기였다. 백제의 "아신왕"은 서해바다를 건너서 지금의 서울 한강에 위치해 있던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慰禮城)으로 배를 타고 "수군"(水軍)을 이끌고 왔다. 임진강(臨津江)을 건너며 고구려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 위례성은 고구려군에 의해서 함락(陷落)되었고 고구려 깃발이 걸렸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아신왕"을 죽이지 않았다. 백제를 고구려의 신하(臣下)의 나라로)대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신왕의 동생인 "부여홍"(扶餘洪)을 인질(人質)로 고구려로 데려갔다. 아신왕은 당시에 오랫동안 친교를 맺고 있던 왜(倭, 지금의 일본)와의 외교 관계에 더욱 힘썼으며 "왜"의 군대로 동해 바다를 건너서 당시의 신라(新羅)의 영토를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돕기 위해서 신라에 군대를 보냈고 왜군(倭軍)을 물리쳤다. 그리고 고구려군은 한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가야(伽倻) 영토까지 진출했다. 사실상 이때부터 "백제"는 "고구려"를 군주(君主)의 나라로 떠받들어 모시는 신하(臣下)의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신라"와 "가야"를 영향권에 두고 식민지(植民地)로 삼았다. 졔25대 무령왕(武寧王) 시절은 양나라와 친교를 맺으며 국내 정치에 힘썼다. 그리고 고구려에 적극적으로 맞서며 백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애썼고 지방에 22담로를 설치하고 왕족을 파견하는 등 중앙 집권 체제로 강화하였다. 제26대 성왕(聖王)은 538년 사비성(泗沘城)으로 천도하고 자신들의 뿌리가 그 옛날 "부여"(夫餘)라는 국가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며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고 정했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 남쪽 지방에 있는 부여의 자손의 나라"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백제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부여 사람이고 그 옛날 자신들이 거주한 곳이 한반도 북쪽 지역에 위치해있던 옛 부여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백제는 신라의 진흥왕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자 554년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管山城) 싸움에서 백제 성왕(聖王)은 신라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성왕 시절에 왜(일본) "불교"를 포함한 백제 문화를 전수하고 "박사"를 보내어 일본 왕실에 가르침을 주었다. 제30대 무왕(武王)은 한때 "서동"이라고 불리우며 "서동요"라는 향가(鄕歌)를 지어서 신라의 서라벌(경주, 慶州)의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고 선화공주를 아내로 얻었다고 전해진다. 일부 역사학계에서는 당시 역사적으로 "백제"가 "신라"와 외교적으로 군사적인 동맹(同盟)을 맺고자 이러한 일이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당시에 중국에서는 수나라 왕조에서 당나라 왕조로 이어지며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백제는 신라를 자주 공략하였으며 승려 관륵을 일본에 보내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제31대 의자왕(義慈王)은 642년에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獼猴城) 등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고구려와 화친하는 등 기울어져 가는 국위 선양(國威宣揚)에 힘썼다. 만년에 사치와 방탕에 흘러서 660년에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여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병에 걸려서 죽었다. "성충"(成忠) 등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의자왕에게 나라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며 위기(危機)를 알렸고 백제의 명장(名將) 계백(階伯)이 "황산벌 전투"에서 고전분투하며 버텼지만 신라군(新羅軍)에게 패하며 백제는 결국 멸망(滅亡)하였다. 그 이후에 백제는 오랜 세월 동안 친분관계를 유지해왔던 "왜"(당시의 일본)에서 백제 출신 왕자 "부여풍"(扶餘豐)을 불러들이고 왜의 군사(軍士)를 빌려서 한반도(韓半島) 남해(南海) 지역 등에 건너왔다. 그리고 백제의 "복신"(福信)장군과 고구려 승려(僧侶)인 "도침"(道琛)과 함께 나당 연합군과 다시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백제부흥운동"(百濟復興運動)은 실패로 끝났다.

*NAVER 백과사전 국어사전 참고함, 그 밖에 자료 참고함, 본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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