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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역사 평가

고대시대 백제-고구려시대

by 느낌 . 2017. 4. 14.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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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라는 나라를 세운 고주몽은 북부여(北夫餘) 출신의 사람이다. 고주몽은 성장해서 자신의 고향인 "북부여"를 떠났고"졸본 부여"(卒本扶餘) 지역에서 그 지역 세력가 딸이었던 소서노(召西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고구려"(高句麗)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웠다. 소서노는 고주몽과 결혼을 하면서 "혼인 동맹"(婚姻同盟)을 맺었다. "동맹"은 둘 이상의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가 서로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하여 동일하게 행동하기로 맹세하여 맺는 약속이나 조직체를 말한다. 그리고 또는 그런 관계를 맺는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에 소서노는 이미 아들이 두명이 있었다.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이다. 소서노가 고주몽과 결혼하기 이전에 이미 아들 2명을 데리고 있었다는 것은 소서노가 이미 고주몽을 만나기 전에 결혼을 했다는것으로 볼 수 있고 과부 신세로 아들 두명을 그대로 자신이 키우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주몽과 소서노의 혼인 동맹 내용은 고주몽이 죽고 난 뒤에 뒤를 이어서 소서노의 아들 중의 한명을 왕으로 정하자는 내용이었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고 고주몽이 북부여에 두고 온 자신의 부인과 아들이 부러진 칼을 가지고 찾아왔다. 고주몽은 자신도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의 일부를 서로 맞추어 보고 확인 뒤 그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온 아들을 자신의 뒤를 이을 태자로 정했다. 그 태자가 "유리왕"(瑠璃王, ?~ 서기 18년)이다. 고구려의 두번째 왕인 "유리왕"(瑠璃王)에 이어서 제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서기 4년~44년)은 동부여(東夫餘)과 개마국(蓋馬國)을 공격하여 고구려 영토로 만들고 낙랑군(樂浪郡)을 몰아내어 국토를 살수(薩水)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제6대 태조왕(太祖王, 47~165)은 중앙집권체제(中央集權體制)를 갖추기 위해서 힘썼다.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시절에 백제(百濟)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는 근초고왕(近肖古王, ?~375년) 세력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당시에 근초고왕은 지금의 중국의 요서 지방에서 연나라(燕)와 전쟁을 벌여서 영토를 넓히고 있었다. "고국원왕" 또한 당시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요동 지역을 고구려 영토로 만들었다. 하지만 "고국원왕"은 "근초고왕"과의 평양성(平壤城)에서의 전투에서 죽었다. 뒤를 이어서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384년)은 국법(國法)을 제정(制定)하여 시행하였고 종교인 불교(佛敎)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태학"(太學)이라는 이름의 국가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삼국시대에서 가장 먼저 중앙 집권 체계를 갖추었다. "고구려"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 받고 있는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91년~412년)은 북방영토를 크게 넓히고 백제를 공격해서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했으며, "신라"(新羅)에 침입한 왜(倭, 지금의 일본)를 격퇴하여 "신라"에 대한 영향을 크게 끼쳤다. 이어서 제20대 장수왕(長壽王, 394년~491년)이 남진 정책(南進政策)에 더욱더 힘써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다. 제26대 영양왕(嬰陽王, ?~618년)시절 수나라(隋, 지금의 중국)가 쳐들어왔을때 천리장성(千里長城, 요동 방어선, 遼東]防禦線)을 쌓고 크게 물리쳤다. 당시에 무리한 영토 확장 정책과 갖은 대규모 시설 공사 정책을 벌여서 자국의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던 수나라(隋)는 고구려 원정 실패 이후 "수양제"(隋煬帝)는 신하의 손에 살해를 당했다. 그리고 수나라는 머지 않아 멸망(滅亡)했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唐)가 건국(建國)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와 수 많은 전쟁을 벌였다. 당시에 고구려에 막리지(莫離支, 고구려에서 군사와 정치를 담당하던 관리) 벼슬을 하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있었는데 제27대왕 영류왕(榮留王, ?~642)을 죽이고 백명에 가까운 고구려 신하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28대왕 보장왕(寶藏王, ?~682)을 세웠다. 당시에 당나라 황제 "이세민"은 고구려왕이었던 영류왕을 연개소문이 죽였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다시 말해서 신하의 신분으로 자신이 모시는 왕을 죽였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이라며 이세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당나라 황제가 내세운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이든 제1차 당나라와의 전쟁에서는 요동성(遼東城)이 함락되었지만 안시성(安市城)에서는 고구려가 최종적으로 방어에 성공하면서 당나라로부터의 공격을 물리쳤다. 하지만 수 많은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약해졌고 국내의 정치 사정의 내분(內紛)으로 큰 어려 움을 겪었다. 그리고 그 이후 신라(新羅)와 나당동맹(羅唐同盟)을 맺은 당나라의 제2차 공격에서 고구려는 무너졌고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서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NAVER 백과사전 국어사전 참고함, 그 밖에 자료 참고함, 본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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