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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高麗 역사 평가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17. 4. 23.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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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統一新羅)가 676년 세워진 후, 세월이 흘러서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때문에 "신라"는 다시 3개의 나라로 갈라졌다. 이 시대를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라고 부른다. 신라 왕족(王族)이자 승려(僧侶) 출신인 "궁예"(弓裔, ?~918)는 후고구려(後高句麗, 901~918)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웠다.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으로 바꾸었다가 911년에 다시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으로 고쳤다. "후고구려"는 신라 장수(將帥) 출신인 "견훤"(甄萱, 867~936)이 세운 "후백제"(後百濟)를 무너뜨렸고 "경순왕"(敬順王, ?~979) 시절의 신라"(新羅)를 흡수(吸收)하여 후삼국시대에서 통일을 이루어냈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 세력은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의 "왕건"(王建)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그리고 918년에 "왕건"(王建)은 "고구려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고려"(高麗)라는 이름으로 나라 이름을 다시 고치고 나라를 세웠다. 시기적으로 대조영이 세운 "발해"가 멸망한 후, 고구려 발해 유민들은 통일된 고려로 내려와 백성이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고려시대"(918년~1392년)가 시작되었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기 이전에 후삼국시대 통일을 위해서 전국 각지의 호족(豪族)들과 혼인 동맹(婚姻同盟)을 맺었다. 그래서 "고려"가 건국된 뒤 넘쳐나는 왕족 자제(子弟) 때문에 왕위 계승(王位繼承)에 대해서 왕권 다툼이 일어났다. 여기에다가 호족 세력은 건국 이전부터 가문(家門)마다 많은 사병(士兵)을 거느리고 있어서 왕실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다. 1170년부터 1270년까지 100년 가까이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기도 했는데, 이 사건을 두고 "무신정권"(武臣政權)이라고 부른다.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 등 이끌었다. 문신(文臣)들을 우대(優待)하고 무신(武臣)들을 하대하는 정책 때문에 무신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무신정권은 실질적으로 권력을 쥐고는 있었지만 그 누구도 "왕"(王)의 자리에는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백성들에 대해 세금 횡포(稅金橫暴)는 여전히 심각했다. 이 시기에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고 쳐들어오고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고 고려를 침략했다. 그리고 몽고족의 징기즈칸(Chingiz Khan, 1162~1227)이 전쟁을 일으켰고 멀리는 동유럽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고 중국 지역에는 "원나라"가 세웠다. 이 원나라 세력이 고려 지역까지 쳐들어 왔고 이후에 홍건적이 침략했다. 왜구 일본 해적도 큰 피해를 주었다. "고려"의 무신들은 이때에 원나라(元)에 저항(抵抗)하였다. 삼별초(三別抄)라는 이름의 특수 부대를 중심으로 조직하여 군대를 이끌었다. 몽고군(蒙古軍)이 물에는 약하다는 이유를 들어서 고려의 수도(首都)를 임시로 지금의 인천 지역의 섬인 강화도(江華島)로 옮겨서 몽고 세력에 저항하였다. "강화도"에서 전라남도 지역의 섬인 "진도"(珍島) 그리고 "제주도"(濟州島)로 쫒겨가며 "원나라"와 힘써 싸웠지만 고려군은 끝내 몽골족에 사실상 패배(敗北)하였다. 그 이후 사실상 원나라의 식민지(植民地)나 다름 없는 생활을 하였다. 원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고려의 왕에 명칭 뒤에 "종"(宗)을 붙이는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제24대 원종(元宗)을 끝으로 제25대 "왕"부터 "왕"(王) 글자가 붙게 되었다. 몽골족은 지나친 영토 확장 욕심으로 인하여 일본 정벌까지 추진했다. 이른바 "여몽 연합군"(麗蒙聯合軍)을 조직했다. 하지만 일본 정벌은 실패로 끝났고 고려는 군사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오히려 "일본"과 외교적으로 안 좋아지는 원인을 낳았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대대적으로 숭상(崇尙)하여 자연스럽게 "불교 문화"가 퍼져서 많은 건축물이 지어졌고 국가 통치 이념(理念)이 되었다. 시대적으로 고려시대에는 "고려청자"라는 이름의 "도자기"(陶瓷器) 그릇과 농작물(農作物)인 "인삼"(人蔘)이 유명했다. 황해도 예성강 하류에 있던 국제 무역항 벽란도(碧瀾渡) 등의 지역에서 세계적으로 외교적인 상거래(商去來)가 활발하였다. 이 당시에 "고려"(高麗)는 영어식 발음으로 "코리아", "코레아"로 외국인들에게 불리워지게 되었고 영어식으로 "KOREA"라고 우리나라는 국가명이 전세계에 알려졌다. "고려"는 강력한 북벌론(征伐論)을 펼쳤고 "서경"(지금의 평양)ㅠ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고려"(高麗)는 제31대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시절 왕위에 오른 뒤에 원나라(元)를 배척(排斥)하고 친원파(親元派)인 기씨(奇氏) 일족을 제거하였다. 원나라의 고려 북부 지방 통치 기관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는 등 "공민왕"은 적극적인 "반원정책"(反元政策)을 폈는데 "원나라" 세력을 지지하던 "권문세족"(權門勢族)의 반발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반대 세력에 죽임을 당하였다. 제32대 우왕(禑王, 1365~1389) 시절 요동 정벌을 떠났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으로 다시 개경으로 돌아온 후 "우왕"을 왕의 자리에서 폐위(廢位)시켰다. 제33대 창왕(昌王, 1380~1389)은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오른 후 얼마되지 않아서 "이성계"가 "창왕"을 왕의 자리에서 폐위(廢位)시켰다. 고려의 마지막 왕의 자리에 오른 34대 공양왕(恭讓王, 1345~1394) 시절 이성계 세력에 의해서 왕위에 올랐으나 고려의 충신(忠臣)이었던 "정몽주"(鄭夢周)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다음에 "공양왕"도 왕의 자리에서 오른 이후 오래지나지 않아서 폐위(廢位)되고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고려"(高麗)는 멸망(滅亡)하였다. 북방의 군인(軍人) 신분인 "이성계"(李成桂)는 "정도전"(鄭道傳)이라는 인물이 이끄는 신진 사대부(新進士大夫)의 지지를 받으며 "고려"를 무너뜨리고 1392년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웠다.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을 사회의 이념으로 받아들여서 중앙 집권적인 양반 관료 체제를 이루어냈다.

*NAVER 백과사전 국어사전 참고함, 그 밖에 자료 참고함, 본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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