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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도전 선택 평가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18. 3. 15.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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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정도전, 조선 태조 이성계)

태조 왕건(王建, 877 ~ 943)이 세운 고려의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시절에는 삼봉 정도전(1342~1398)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망가져가는 고려시대 끝무렵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단순히 올바로 개선하고 고쳐나가는 정책보다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시대를 건설하는 변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목은 이색(李穡, 1328 ~ 1396) 선생을 스승으로 삼아서 그의 제자가 되어 배우고 익혔고 같은 동문(同門)이었던 신진 사대부(新進士大夫)들과 어울리며 정치를 하였다. 앞서 밝힌대로 정도전은 차차 고려시대에 미련을 버리고 고대시대의 동양의 학자였던 맹자(孟子) 사상을 동경(憧憬)하여 스스로 깨달았다. 왕씨(王氏) 성(姓)을 따르는 왕조(王朝)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새로운 성씨(姓氏)의 나라 왕조를 세우기 위해서 그 태조가 될 만한 인물(새나라의 지도자, 首長)을 찾아나섰다. 정도전이라는 이름의 인물은 나랏님의 미움을 받고 정계(政界)에서도 세력이 미약하여 밀려나서 수도에서 떨어진 멀리 떨어진 먼 지역 지방으로 죄값삼아 유배(流配)를 오래하며 평생을 고생하였다. 백성들은 어려운 살림살이로 살아갔고 중신(重臣)을 비롯한 벼슬아치 관료(官僚, 공무원, 公務員), 양반(兩班)으로부터 지나친 세금을 냈다. 나라 밖에서는 국내를 위협하는 외적(外敵)들로부터 많은 인명들이 죽고 피해를 입었으며 재산 피해(財産被害)를 받았다. 이러한 모습들은 정도전은 전국을 떠돌며고 귀양살이(유배)를 해오면서 보아왔다. 그래서 새나라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원래 어느 한 나라가 망해가는 시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는 기미가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망해가는 국가에는 안 좋은 일들이 유난히 많이 일어났고 그 징조(徵兆)가 좋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안 좋은 기운의 현상은 전(前) 정권(政權)보다 새롭게 일어난 정권의 치적(治績)을 빛내주고 정통성(正統性)을 세워주며 역사적 당위성(當爲性)을 앞세우기 위해서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더욱이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役史) 앞에서 떳떳한 일을 했노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역사서(歷史書)를 기록(記錄)하고 편찬(編纂)하는 사관(史官)들은 더욱 새로운 정권의 정당성을 높여주기 위해서 전에 있었던 정권에 일어났던 사건과 사고 그리고 나쁜 현상들을 두고 때로는 더욱 과장되고 선정적이고 폭력적으로 그리고 공로(功勞)는 다소 축소하여 기록한 측면이 있다. 아무튼 이러했던 시기에 활동했던 정도전은 새로운 새나라의 태조로 섬길 인물로 무장(武裝)인 이성계(李成桂, 1335 ~ 1408)를 선택했다. 당시 이성계는 무장으로서 소위 동북면이라고 불리우던 지리상 위치적으로 고려의 북쪽 변방 지역에서 소위 가별초(家別抄)라는 이름의 많은 사병(私兵)들과 관군(官軍)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군벌(軍閥) 조직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북방 지역에서 가별초라는 군사집단을 보유하고 있는 명분(名分)은 나라를 외적들로부터 지키는 국방(國防)의 의무(義務)였지만 그의 세력이 워낙 커서 고려 조정에서 큰 골치거리였다. 과거에 고려시대 중기에도 소위 무신정권(武臣政權, 1170~1270)이 들어서서 무장(군인, 軍人)들이 문인(文人)들을 중신에서 끌어내고 정치를 하며 왕(王)은 허수아비나 불과했던 시절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은 고려말 시절에도 무신정권 상황과 그다지 큰 차이는 없었다. 여전히 군인들이 정치에 참여를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최영(崔瑩, 1316~1388)이었고 이성계도 정치에 관여(關與)를 하였다. 이렇듯이 강력한 힘을 가진 이성계는 정도전이 보았을때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태조 인물감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신진사대부들의 도움을 받았다. 최영 장군의 주도하에 명나라(당시의 중국)를 공격하고자 했던 전쟁을 위해서 북쪽(北)으로 향하던 행군(行軍)에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1388)을 하였다. 강력한 대규모 군대(軍隊)를 이끌고 있던 그는 도로 말머리를 돌려서 고려(高麗)의 수도였던 개경(開京, 개성)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전투를 벌이고 이성계의 군대는 승리하며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가까운 시일내에 조선(朝鮮)을 세웠다. 한양(漢陽, 서울)으로 수도(首都)를 옮기며 본격적으로 조선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5째 아들인 이방원(태종, 李芳遠)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정도전이 이방원의 신하(臣下)가 되기를 끝내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기를 원치 않았다. 그 이유는 정도전이 펼치고자 했던 이상향의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이방원을 견제했고 이방원을 제거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방원은 조선의 3대 왕으로 오른 이후, 정도전이 이끌어낸 거의 모든 정책(政策)을 수용(受容)하였다. 하지만 정도전은 공신에서 역적(逆賊)으로 기록하였다. 철저하게 정치 보복(政治報復)을 한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구한말(舊韓末)에 고종 임금 시절에 뒤늦게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인정받았고 간신히 신원복권(身元復權)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정도전은 위인(偉人)으로 떠받들어지게 되었다.

*본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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