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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신분상승운동 폐단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18. 5. 19.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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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과거 중세시대 즈음의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백성들의 이른바 "신분상승운동"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신분 상승 운동은 조선시대 후기에 중점적으로 나타났다. 당시 "왜"(당시의 일본)가 일으킨 대륙침략전쟁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은 조선 사회를 그야말로 처참하고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서 당시 조선은 조정(朝廷)과 사회 지도층 사대부(士大夫)들이 무너졌고 그들의 무능함에 일반 백성들은 좌절했다. 조선 사회가 기본적으로 복구가 될 즈음에 돈푼께나 모은 평민층들은 이른바 신분 상승이라는 사회 분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주로 "중인"(中人)과 많은 부(富)룰 쌓은 상인(商人) 계층이 해당 사항이 되었다. 중인들은 자료를 참고해서 말하자면 조선시대에, 양반과 평민의 중간에 있던 신분 계급(身分階級)으로 세습적인 기술직(技術職)이나 사무직(事務職)에 종사하던 사람들로 15세기부터 형성되어 조선 후기에는 하나의 독립된 신분층을 이루었다. 기술관(技術官) 및 향리(鄕吏), 서리(書吏), 토관(土官), 군교(軍校), 역리(驛吏) 등의 경외(京外) 아전(衙前)과 양반(兩班)에서 신분이 낮아진 서얼(庶孼) 등이었다. 기술관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둔 전문 기능직의 벼슬아치(공무원)를 가리키며 역학(疫學), 의학(醫學), 음양학(陰陽學), 율학(律學), 산학(産學), 도화(圖畫),도교(道敎), 이문(吏文), 사자(寫字) 따위의 일을 맡았다. 그들은 정삼품 당하관 벼슬까지 오를 수 있었다. 향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한 고을에서 대물림으로 내려오던 직업이었고 서리는 조선 시대에 중앙 관아(中央官衙)에 속하여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맡아보던 하급 직업이었다. 토관은 고려시대와 조선 시대에 조선 북쪽 지방인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 에 거주하는 지역 사람들에게 특별히 베푼 직업이었고 군교(軍校, 陸海空軍)는 육군과 공군 해군 소속 군인들이다. 역리는 역참(驛站)에 속하여 조선시대에 있던 공공기관에서 기별, 역마, 역원 등 여행 체계에 관련된 일을 하던 직업이다. 원래부터 "조선"이라는 국가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체계(體系))가 일반화된 사회였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이라는 대표적인 개국공신(開國功臣)들인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하륜(河崙) 등의 사대부들이 중국(中國) 춘추시대 출신의 공자(孔子)의 사상인 유학(儒敎) 이념(理念)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낸 나라이다. 그래서 당연히 기술직이나 상업 종사자들은 하등 계급은 천시하고 차별하는 정책을 폈다. 이런 와중에 조선 중기 왜(일본)이 일으킨 큰 재난(임진왜란)을 겪고 나서는 조선 사회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그것은 조선 사회 지도층이 일부 붕괴된 것이다.

그래서 돈 푼 깨나 만지게 된 하층민들이 이른바 양반들의 신분증이나 다름 없는 "족보"(族譜)를 큰 돈을 주고 어느 양반 집안으로부터 족보를 구입하여 신분 상승을 추구할 수 있었다. 족보는 어느 한 가문(家門, 家紋)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적어 기록한 책으로 양반 사대부들의 일종의 상징(象徵)같은 존재였다. 다시 말해서 양반 족보를 가지고 있으면 그 집안이 곧 양반 집안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경쟁적으로 가짜 짝퉁 족보까지 만드는 무리까지 출현하여 그 폐단(弊端)이 매우 심했다. 이로 말미암아 사회 구성원은 60~70%가 양반 사대부가 되었고 20~30%가 평민(상민)과 노비로 이루어지는 거꾸로 아래로 뒤집어진 피라미드 신분 구조 현상이 벌어졌다. 다른 경우로는 외국인들이 조선인(내국인, 內國人)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야가"(김충선, 金忠善, 1571~?)라는 이름의 일본인이다. 그는 조선시대에 조선 사람으로 귀화(歸化)한 사람이다. "사야가"는 임진왜란 때에 왜군 장군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장(先鋒將)으로 조선에 왔는데 당시 조선 장군 "박진"(朴晉)을 통해서 조선에 귀부(歸附)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외적(外敵)과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워 당시 조선 임금(王)이던 "선조"(宣祖)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벼슬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정유재란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의 전쟁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하멜"(Hamel, Hendrik, ?~1692)이라는 이름의 유럽인이 1653년 일본의 "나가사키" 지역으로 바다로 배를 타고 가던 도중에 폭풍을 만나서 일행 36명과 함께 사고로 제주도에 온적도 있다. 그는 조선으로부터 1666년 탈출하여 1668년 자신의 나라로 귀국했다. "하멜"은 네덜란드(Netherlands) 국적의 사람으로 임금 효종 4년(1653)에 일행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14년 동안 제주도에서 억류 생활을 당했다. 하멜은 동인도 회사 소속 상선이었다. 자료를 참고해서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당시 제주목사(濟州牧使)였던 이원진(李元鎭)은 하멜 일행을 체포하여 감금(監禁)하였고 네덜란드 출신으로 조선에 귀화한 박연(朴燕, 얀 얀스 벨테브레 Jan Janse Weltevree)이 한양(지금의 서울)에서 제주도로 와서 하멜을 상대로 통역을 하여 현지 생활을 도왔다고 한다. 하멜은 자신의 국가로 돌아간 후 자신의 경험을 담은 "하멜 표류기"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하여 조선의 지리, 풍속, 정치 상황 등을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참고 자료 - NAVER 국어사전, NAVER 지식백과, 본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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