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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건 태자 왕위 계승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2. 7. 3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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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 태조 왕건(王建)은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를 통일했다. 오래전부터 왕건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 지방 호족들의 여식과 혼인 동맹을 맺어왔다. 그래서 왕건은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왕건은 왕비 6명과 후궁 23명을 두었고 25명의 왕자와 공주를 낳았다. 태조 왕건의 뒤를 이어서 제2대 혜종이 왕위에 올랐다. 혜종(惠宗)은 왕건 첫째 아들이다. 그는 이복동생들과 왕위 다툼을 벌였다. 제3대 왕은 정종(定宗)이다. 왕건의 아들이고 혜종의 이복동생이다. 서경(西京,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재위기간은 4년이다. 제4대 왕은 광종이다. 왕건의 아들이고 정종의 동생이다. 이처럼 태조 왕건 이후 제2대부터 제4대에 이르기까지 서기 943년부터 서기 975년까지 왕건의 아들 3명이 연이어서 왕위에 올랐다.이 과정에서 치열한 왕위 다툼이 벌어졌다. 제2대 혜종(惠宗)은 태조 왕건(王建)의 첫째 아들로 자는 승건(承乾), 휘(諱)는 무(武)이다. 시호는 의공(義恭)이다.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고 혜종의 비(妃)는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인 의화왕후(義和王后)이다. 왕건은 궁예(弓裔)의 부하 장수로 있을때 후백제의 영토였던 전라도 나주(羅州)를 정벌하고 그곳에서 나주 지역 호족(豪族)의 딸인 오씨와 결혼했다. 당시에 나주 오씨 집안의 세력은 권력이나 군사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출신 배경으로 오씨의 아들 왕무(王武)는 이후에 왕위쟁탈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서기 921년 박술희(朴述熙) 등의 도움으로 "왕무"는 태자로 책봉된 뒤에 태조와 전장에 나가서 후백제(後百濟)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서기 943년 태조가 죽자 혜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복동생인 왕요(王堯, 훗날의 정종)와 왕소(王昭, 훗날의 광종)가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 "왕요"와 "왕소"는 태조의 셋째 왕비 신명순왕후 유씨의 소생으로 충청도 충주(忠州) 지역 호족이었던 유긍달(劉兢達)의 외손자였다. 당시에 충주 유씨 가문은 혼인을 통해서 여러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왕요"와 "왕소"가 왕이 되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알게 된 왕규(王規)는 서기 945년에 이 사실을 혜종에게 알렸으나 혜종은 "왕요"와 "왕소"를 죄인으로 대하지 않았다. 혜종이 "왕요"와 "왕소"를 그대로 내버려두자 불만을 가진 왕규는 혜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이러한 왕권 다툼 속에서 혜종은 서기 945년에 병으로 죽었다. 이어서 이복동생 왕요(정종)가 왕위에 올랐다. "왕요"가 혜종의 유언에 따라서 왕위에 오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기록에는 "왕요"가 스스로 군신의 추대를 받아서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혜종이 병으로 죽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제3대 왕 정종(定宗)은 자는 의천(義天)이고 이름이 왕요(王堯)이다. 시호는 문명(文明)이고 태조(太祖)의 셋째 아들로 서기 923년(태조 6년)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며 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朴氏)와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이다. 혜종이 집권하던 시기에 왕위에 뜻이 있었으며 혜종과 가까운 신하였던 박술희를 제거했고 혜종이 죽자 신하들이 왕요(정종)을 왕위에 올렸다. 정종이 왕으로 즉위한 초기에 왕식렴(王式廉) 등의 도움을 받아 외가 친척이 정치 권력을 행사하자 왕규(王規) 등과 대립을 했다. 그래서 대립을 하고 있던 신하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개경(開京, 고려의 수도)의 호족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맞서자 왕권이 제대로 강화되지 않았다. 서기 949년 정종의 뒤를 이어 제4대 왕 광종(光宗)이 왕위에 올랐다. 태조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왕소"이고 제3대 왕 정종의 친동생이다. 태조의 세 번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소생으로 충주를 외가로 한 광종은 형인 정종보다 정치적 세력이 더 강했다. 그 배경에는 황해도 황주(黃州)를 기반으로 한 대목왕후 황보씨 가문의 든든한 후원 덕분이었다. 광종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부인인 대목왕후 황보씨는 신정왕태후와 태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데 이처럼 광종은 이복누이와 결혼하면서 강력한 호족 세력의 지지를 얻었다. 또 다른 부인인 경화궁부인 임씨는 제2대 왕 혜종의 장녀로 광종에게는 조카이다. 이렇게 광종은 누이 동생과 조카와 결혼을 하면서 왕실 족내혼(族內婚)을 했다. 고려왕실의 족내혼(근친혼)은 사실 신라 왕실의 족내혼 풍습과 그 의도와 뜻이 같았다. 외가 친척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족외혼(族外婚)과는 다르게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광종은 왕위에 올라서 광덕(光德)이란 연호(年號)를 선포했고 노비안검법과 과거 제도, 관복의 제정을 시행했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 인물한국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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