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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의 정치 비극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2. 8. 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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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녹수, 연산군

조선시대에 장녹수(張綠水)는 연산군(燕山君)에게 성은(聖恩)을 받았다. 장녹수는 처음에 제안대군(齊安大君: 성종의 從弟)의 여성 하인이었는데 외모가 아름다고 노래하고 춤추기를 잘했다. 연산군은 장녹수가 마음에 들어서 궁궐로 데려왔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어명으로 처음에는 종4품 숙원(淑媛)에 봉해졌다가 1503년에는 종3품 숙용(淑容)으로 품계가 올라갔다. 장녹수는 기회를 틈 타서 나랏일에 개입하고 재정(財政)을 부족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연산군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1506년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면서 장녹수는 칼로 목이 베이는 참형(斬刑) 선고를 받았고 중죄인의 신분으로 떨어져서 개인 소유 재산을 모두 관아의 장부에 등록하여 빼앗겼다. 참형 선고를 받았지만 사실 장녹수는 길거리에서 돌무더기에 깔려서 백성들의 온갖 비난을 받으며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이렇듯이 장녹수라는 여인을 아끼던 조선의 제10대 왕 연산군(燕山君, 1476년~1506년)은 재위 시절에 무오사화(戊午士禍) 사건과 갑자사화(甲子士禍) 사건이 일어났다. 무오사화(戊午士禍) 사건은 1498년(연산군 4년)에 김일손(金馹孫) 등의 신진 사류 사림파들이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모인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당한 사건이다. 세조(世祖)는 왕이 되고 나서 조선의 중앙집권과 부국강병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그러자 훈구파 대신들의 권세가 높아지고 막대한 부를 축척하면서 부정부패와 잘못된 폐단을 낳았다. 성종 때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정치 세력으로 새롭게 등장했고 정계에 진출했다. 사림파는 3사(三司: 司諫院 , 司憲府, 弘文館)의 언론직(言論職) 및 사관직(史官職)을 장악했다. 그리고 훈구파 출신의 신하가 저지른 잘못된 행위를 찾아내어 세상에 알려서 문제를 삼았다. 그리고 연산군의 향락(享樂)을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專制化)를 반대했다.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보고 사림이 붕당을 만들어서 정치를 제대로 못한다고 비판했다.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하자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이 된 이극돈,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덮붙여서 기록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端宗)을 물러나게 하고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고 문제를 삼았고 사림파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알렸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했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묘를 파헤쳐 관에서 시체를 꺼내어 목을 베었다.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이극돈이 파면된 뒤에 유자광은 그 세력이 더욱 커졌고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희생되었다. 사초(史草) 때문에 일어난 사화(士禍)라고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부른다. 갑자사화(甲子士禍) 사건은 1504년(연산군 10년)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尹氏)의 폐위되었다가 복귀가 된 것이 문제가 되어 일어난 사화이다. 성종비(成宗妃) 윤씨는 질투가 심했고 윤씨 스스로 자기 몸가짐 처신을 잘못했다는 이유를 들어서 1479년(성종 10년)에 왕비 지위에서 폐위되었고 1482년에 사약(死藥)을 받아서 먹고 죽었는데 윤씨가 왕비 지위에서 폐위되고 독약을 먹고 죽은 것은 윤씨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성종의 성은을 받았던 엄숙의(嚴叔儀), 정숙의(鄭叔儀)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함께 뜻을 모아서 윤씨가 죽게 만든 이유도 있었다.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고(國庫)가 바닥이 났고 국고가 바닥이 나자 연산군은 공신들의 재산을 몰수하려 했는데 당시에 임사홍(任士洪)은 연산군을 부추겨서 공신을 배척하도록 만드려고 했다. 당시에 폐비 윤씨의 어머니인 신씨(申氏)가 윤씨가 폐비 신분이 되어 죽게 된 과정을 임사홍에게 알렸고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알리면서 사건이 커졌다.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복수를 하고 공신들에게도 권력을 행사하려 했다. 연산군은 정숙의, 엄숙의를 궁궐에서 죽였고 그들의 소생도 귀양을 보내고 사약을 보내서 죽였다.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도 정숙의와 엄숙의와 함께 한패라고 보았다. 연산군은 비참하게 죽은 자신의 어머니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폐비 윤씨를 다시 복위(復位)시켜 왕비로 추숭(追崇)하고 성종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려 하였는데 응교 권달수(權達手), 이행(李荇)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에 처하고 이행은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이와 연관된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다. 그리고 홍귀달(洪貴達), 주계군(朱溪君) 등 수십명이 참혹한 화를 당했다. 이후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 두피디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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