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조선 단종 세조 수양대군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2. 8. 3. 08:44

본문

세조, 단종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조선 제7대 왕(1417년~1468년)으로 세조(世祖)이다. 휘는 유(瑈)이고 자는 수지(粹之)이다. 국방, 외교, 토지 제도 및 관제의 개혁과 개편 따위에 업적을 남겼으며 "국조보감", "경국대전" 따위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저서에 "석보상절"이 있다. 단종(端宗)은 제6대 왕(1441년~1457년)으로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그리고 강원도 영월에 유배를 가서 죽임을 당했다. 단종은 죽은지 241년 뒤인 조선 19대 왕 숙종(肅宗) 24년(1698년)에 왕위를 추복(追復)하여 묘호를 단종이라고 지었다. 1448년(세종 30년) 8세 때 의정부의 건의로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450년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단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왕세자 책봉이 있던 해에 문종은 왕세자를 위해 처음으로 서연(書筵)을 열어서 "스승"과 "손님"들이 서로 상견례(相見禮)를 하였다. 이때 문종은 좌빈객 이개(李塏)와 우사경 유성원(柳誠源)에게 왕세자 단종이 배우도록 가르치라고 어명을 내렸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게 되자 그 뒤에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단종이 나이가 어려서 조정에서 정치를 제대로 하기 어려웠기에 모든 조처는 의정부(議政府)와 6조(六曹, 조선시대 6개의 중앙관청)에서 서로 의논하여 처리하기로 하고 승정원(承政院)은 왕명 출납을 맡고 있었기에 신하들의 사사로운 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敎書)를 내리게 했다. 문종이 죽으면서 이러한 내용의 어명을 내렸다. 그리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단종의 가까이에 있으면서 보호하고 도왔다. 또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신숙주(申叔舟), 이개, 유성원 등의 신하들도 과거에 집현전에 있을때 세종(世宗)이 단종을 보호하라고 어명을 내렸으므로 단종의 가까이에서 힘을 합하여 도왔다. 1453년 10월에  단종의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치 권력을 빼앗고자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이 계책(計策)을 꾸미게 했다. 좌의정 김종서는 그의 집에서 죽였고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은 궁궐에서 죽였다. 그들의 죄명은 수양대군의 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일의 시비를 가리기도 전에 정치 권력은 수양대군에게로 넘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들의 요구에 따라서 단종은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았고 군사와 관련된 관직의 일도 모두 수양대군에게 맡겼다. 수양대군은 이번 거사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인정하여 모두 공신 칭호를 내렸다. 1455년 윤6월에 수양대군이 조정의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 여러 종친과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서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요구하자 단종은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이러한 주변 정세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단종은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단종을 모시던 신하들이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대해서 연회가 열리던 날에 그 자리에서 세조(수양대군)를 죽이고 그의 세력도 함께 제거한 뒤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김질(金礩)의 배신으로 인해서 알려졌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의 주동 인물 중에서 많은 사람이 사형을 당했다. 단종은 이 사건이 있은 뒤에 상왕(단종)도 이 사건에 관련이 있다며 한양(漢陽, 서울)에서 내쫓자고 신하들이 세조에게 건의했다. 그래서 단종은 1457년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봉해져서 강원도 영월에 유배를 갔다. 수양대군은 1417년 세종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휘(諱)는 유(瑈)이고 자는 수지(粹之)이며 시호는 혜장(惠莊)이다. 윤번(尹璠)의 딸과 결혼을 했고 윤번의 딸 윤씨는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되었다. 수양대군은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홍달손(洪達孫), 양정(楊汀) 등의 30여 명의 무인 세력을 자신의 세력 안에 두었다. 그리고 단종의 왕권을 빼앗는 계획을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 1452년 10월 수양대군은 조선의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명나라(明, 지금의 중국)로부터 자신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지게 해야 했기에 그 목적으로 사신으로 가는 사은사(謝恩使)에 스스로 동참하여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왔다. 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에 무사들을 이끌고 김종서를 죽인 뒤에 단종에게 중신들이 궁궐로 오도록 어명을 내리게 했다.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찬성(贊成), 이양(李穰) 등을 궁궐 대문에서 죽이고 우의정 정분(鄭苯) 등은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를 보낸 뒤에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 사건을 계유정란(癸酉靖難)이라고 부른다. 수양대군은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事), 이조 병조판서(吏曹兵曹判書),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의 벼슬에 오르면서 군사 권한을 장악하고 좌의정에 정인지(鄭麟趾)를 우의정에는 한확(韓確)을 임명했다. 집현전에서는 수양대군의 찬양의 교서를 짓게 하였다. 1455년에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위협하고 협박하여 왕위를 자신에게 선위(禪位)하게 했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상왕(上王)이 되어 물러났지만 이미 유학이 정치적 이념으로 자리잡은 조선에서 충신들에 의해서 단종이 다시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났다.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류성원 등이 사건을 주도했는데 이 사건은 세조를 살해하는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거사(擧事)를 실행하기도 전에 발각(發覺)이 되어 거사와 관련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모두 다 죽임을 당했다.

*본인 작성, NAVER 국어사전, 지식백과, 두산백과, 인물한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