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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日本일본 파견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3. 1. 29.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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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이동 경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1404년(조선시대 태종 4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交隣關係)가 성립되어 조선 국왕과 막부장군은 각기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절(使節)을 각각 파견한 사신(使臣)이다. 일본의 막부정권이 조선 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은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불렀다. 통신(通信)은 조선과 일본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조선시대 태종 13년)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도중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다. 그뒤 통신사의 파견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1429년(조선시대 세종 11년) 일본 교토(京都)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朴瑞生)의 사절단이 최초의 통신사이다.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한 목적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전에는 주로 왜구(倭寇, 일본 해적)을 막아달라는것이 주된 요청이었으나 그 이후에는 강화 조약 체결과 일본에서 끌려간 조선 백성 포로들을 데려오고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 일본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한 수행 역할도 하였다. 통신사 파견 절차는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장군의 승계가 결정이 되면은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조선에 파견하고 그 다음에 조선 조정에서는 중앙관리 3명 이하로 정사, 부사, 서장관을 임명하고 300명~5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편성하였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에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배를 타고 바닷길로 이용하여 일본 대마도(對馬島, 쓰시마)로 갔고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하여 일본 각 번의 대접을 받으며 오사카(大阪)의 요도우라(淀浦)에 갔다. 그리고 다시 육로로 교토(京都)로 갔다. 조선 전기에는 이곳에 장군(쇼군)이 있었기 때문에 교토가 종점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장군이 도쿄(東京)에 있었기 때문에 목적지가 도쿄가 되었다. 조선의 국왕(國王)의 국서(國書)를 전달한 통신사는 일본에서 답서(答書)를 받아서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6개월에서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막부정치를 하던 시절에는 센고쿠 전국시대(戰國時代, 영토 통일 전쟁)가 막 끝난 시기였다. 당시 일본 국왕 천황(天皇)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권력이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일본 조정은 임진왜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국왕(國王)은 선조(宣祖)였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조선 조정이 일본 정권에 항복을 하고 일본의 속국(屬國)이 되겠다고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알리려고 조선에서 통신사를 보낸줄 잘못 알고 있었다. 여기에는 일본 내부에서 사건을 왜곡하여 조선이 항복하러 왔다고 조작한 측면도 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는 조선 후기에 일본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이다. "통신"은 "조선 국왕의 뜻을 일본에 전한다"라는 의미이다. 일본 무신정권 막부정치의 수장(首長)이었던 쇼군(將軍, 장군)이 새로 즉위할 때 통신사를 파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외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곧바로 보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통신사가 쇼군이나 일본의 신하들과 직접 협상하여 외교 안건을 해결할 수도 있었다. 일본의 지형과 풍속 등을 살펴 보고 왜구(倭寇, 일본 해적)가 조선을 약탈하거나 일본이 군대를 조선에 보내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와 같은 비상사태를 대비하고자 일본에 가서 정치 상황과 사회 분위기를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조선통신사 일행은 당시 일본에 있는 유럽에서 가져온 조총(鳥銃) 같은 무기(武器) 등도 살펴보았다.

*본인 작성, NAVER 두산백과, 나무위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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