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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센고쿠 전국 시대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2. 8. 11.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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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시대 일본 열도의 무사 가문 세력 지도
일본 시대별 수도와 설명글

일본 센고쿠시대(전국시대)는 무로마치 막부 말기부터 시작된 일본의 혼란기였고 과도기였다. 크고 작은 수 많은 무사 가문 세력들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비교해서 이 시대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부르는데 일본어 본토 발음으로는 센고쿠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의 역사에서 서기 1467년에 오닌(應仁)의 난 때부터 1573년에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를 완전히 멸망시킨 사건이 일어난 시대까지를 센코쿠 시대라고 보고 있다. 경제적인 문제에 쇼군(무사 가문 정권, 장군) 시대에 실권자 계승 논란이 겹쳐져서 일어난 오닌의 난(1467년~1477년)은 일반적으로 센고쿠 시대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 전쟁에서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가 이끄는 동군(東軍)과 야마나 소젠(山名宗全)이 이끄는 서군(西軍)은 교토(京都)도 근처 지역에서 11년간 서로 싸웠으며 이어서 다른 구니(독립된 하나의 무사 가문 세력)들도 동참하여 전쟁이 확대되고 커졌다. 일본에서 아시카가 가문의 바쿠후(足利幕府)가 집권했던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말기에는 중앙 정부의 권위가 약해져셔 지방 세력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자 자신이 힘이 쎈 강한 무사 가문이라고 주장하며 서로 세력 다툼을 했다. 이 시대에 지방 장관격인 슈고(守護)의 그 대리인 슈고다이(守護代) 지역 호족인 고쿠진(國人) 등의 출신들이 센고쿠(戰國, 전국) 다이묘(大名,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던 무사)로 거듭나서 지방의 영주로서 중세적 지배구조를 점차 붕괴시켰고 자신의 영지를 기반으로 하여 지역국가로 발전했다. 이들 지역국가는 일본 각지에서 나란히 일어났고 지역국가 간에 발생한 정치적 경제적 문제는 주로 무력(武力)으로 전투의 승패에 따라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센고쿠 시대를 다시 해석하자면 오닌(應仁)의 난이 일어난 1467년부터 센고쿠 시대가 시작되었고 그 마지막은 두가지 설이 있는데 제15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쫓겨나고 무로마치 바쿠후가 멸망한 1573년에 끝난 시점으로 보기도 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한 1590년이 전국시대가 끝난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일본 역사 학계의 통설은 서기 1573년을 전국시대가 끝난 시점으로 보고 있다. 1573년은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죽고 무로마치 막부의 교토에서 쫒겨났으며 "아자이 가문"과 "아사쿠라 가문"의 연합이 멸망하고 오다 노부나가의 긴키 지역에 대한 패권이 확립된 시대였다. 그래서 1573년은 일본 전국시대에서 매우 중요한 때이다. 이후부터는 일본 열도의 패권을 놓고 오다 가문, 도요토미 가문, 도쿠가와 가문으로 권력 다툼의 시대가 이어졌다. 1493년의 아시카 가문 쇼군 폐위 사건(메이오 정변)이 일어났고 1467년의 오닌의 난에서 시작하여 1573년까지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서 교토에서 추방되어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한 이후에도 전쟁터만 조선으로 바뀌었을뿐 전쟁은 여전히 계속 되었다. 쇼군 가문인 아시카가 가문의 무로마치 막부가 명목상은 존재하고 있었으나 많은 다이묘와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다이묘들까지 반기를 들었다. 이 시기에 중국과의 무역이 늘어남에 따라서 경제적인 발전을 이룩하였고 화폐의 사용이 늘어나고 상업 도시들이 탄생하였으며 농업과 소규모 제조업의 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서 지방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특히 15세기 초에 백성들은 배고프고 가난한 생활 형편을 이어나갔고 지진이 일어나서 자연 환경이 파괴되고 지배층의 각종 무리한 세금 징수 때문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센고쿠 시대가 시작되는 시기를 앞당긴 것이다. 백년에 가까운 시절 동안의 정치적인 불안정과 내전(內戰)은 계속되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현재의 아이치현의 일부인 오와리 지역의 이름 없는 영주에서 일본 중부 지방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1582년에 부장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배반하여 오다 노부나가는 죽임을 당했다(혼노지의 변). 오다 가문의 졸병(卒兵, 직위가 낮은 병사) 신분 출신으로 시작하여 노부나가의 신뢰를 받고 부장으로 성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를 계기로 기회로 삼아서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도요토미는 남은 다이묘들과 관계를 유지하며 통제하는데 있어서 해결을 보았으며 본시 도요토미는 천한 계급의 출신이었기 때문에 쇼군의 지위에는 오르지는 못했다. 그 대신에 조정의 최고위직인 간파쿠(관백) 자리에 취임하여 도요토미 정권을 세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했고 바다 건너 조선(朝鮮)을 침략했다. 일본 무사들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 조선에서 명나라(明, 지금의 중국) 군사와도 싸웠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은 다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을 상대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겼고 도쿄(東京) 지역에 "에도 막부"를 세우고 쇼군 실권자가 되어 일본 열도를 다스리게 되었다.

*본인 작성, 나무위키, NAVER 국어사전, 지식백과 두산백과, 위키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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