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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5호 16국 시대 국가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2. 9. 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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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16국의 성립과 한족의 이동

#5호는 흉노족, 선비족, 갈족, 저족, 강족 등 5개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한족(漢族)이 있다. 5개의 이민족과 한족이 16개의 나라를 건국했다. 지금의 수 많은 이민족들은 오늘날에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 중에는 오래전에 나라를 세웠다. 16개의 나라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조(漢, 前趙, 304년~329년) - 흉노족(匈奴族) 출신의 유연(劉淵)이 나라를 세웠다. 산시성 북부에 살던 흉노족(匈奴族)은 서진(西晉)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족장 유연(劉淵)을 대선우(大單于)로 왕으로 세우고 서기 304년 서진의 통치를 이탈하여 나라 이름을 한나라(漢)이라고 정했다. 그의 아들 총(聰)이 있던 시절에 뤄양, 장안을 함락시키고 서진을 멸망시켰다. 유요(劉曜)가 황제가 되자 국호를 조(趙)라고 고치고 장안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후에 흉노 사람 석씨(石氏)가 세운 조(後趙)와 구별하여 전조(前趙)라고 부른다. 328년 요(曜)는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에게 피살되었으며 다음해에 태자였던 희(熙)도 잡혀가서 6대에 나라가 멸망하였다.

#성한(成漢, 302년~347년) - 저족(氐族) 출신의 이웅(李雄)이 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이민족 국가인 5호 16국 가운데에 302년에 저족(氐族)의 추장 이웅(李雄)이 221년에 유비(劉備)가 세운 나라인 촉(蜀)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이다. 성도(成都)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처음에 국호(나라이름)를 성(成)으로 하였다가 뒤에 한(漢)으로 고쳤으며 347년에 동진(東晉)에게 멸망당했다.

#전량(前凉, 314년~376년) - 한족(漢族) 출신의 장궤(張軌)가 나라를 세웠다. 한족 명가 출신인 장궤(張軌)는 301년에 진나라(晉)의 양주자사(凉州刺史)로 임용되자 고장(姑藏)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하서(河西) 지방을 지배권에 두었다. 자손이 그 지위를 계승하고 진나라의 관작(官爵)을 받아서 양주목서평공(凉州牧西平公)이 되었으나 반독립국(半獨立國)의 체제를 형성하였다. 사서(史書)에서는 역대 여러 양나라(凉) 왕조와 구분하기 위해서 전량이라고 부른다. 장준(張駿) 시절에 서방으로 세력을 뻗어 고창(高昌)을 정복하고 나라를 진(秦), 하(河), 정(定), 양(凉). 상(商), 사(沙) 등 6주(州) 지역으로 나누었다. 준의 아들 중화(重華) 시절에 후조(後趙)가 침략하여 공격했으나 물리치고 나라를 유지했다. 그러나 중화 이후에는 내정이 문란해져 376년 장천석(張天錫)은 전진(前秦)에게 항복하여 9대 만에 멸망하였다.

#후조(後趙, 319년~351년) - 갈족(羯族)의 출신의 석륵(石勒)이 나라를 세웠다. 흉노(匈奴)의 별종(別種)인 갈족(羯) 출신의 석륵(石勒)은 전조(前趙)의 유총(劉聰)의 부장으로 있다가 319년에 전조로부터 자립하여 대선우조왕(大單于趙王, 高祖)이 되었고 양국(襄國)을 근거지로 하여 화북(華北)의 일대를 지배하였다. 329년 전조를 멸망시켰고 그 연고지를 합병하였다. 석륵이 죽은 뒤 334년에 석호(石虎)가 그 유업을 이어 업(鄴)에 도읍을 옮기고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고 토목사업으로 백성들을 동원했다. 349년에 석호가 죽자 정변이 자주 일어나 한족 사람(漢人) 염민(冉閔)에게 제위를 빼앗겼다. 이후 양국에서 즉위한 석지(石祗)도 죽임을 당하고 멸망했다.

#전연(前燕, 337년~370년) - 선비족(鮮卑族) 출신의 모용황(慕容皝)이 나라를 세웠다. 3세기 말에 선비족(鮮卑族)의 추장 모용 외(慕容廆)는 극성(棘城)에 도읍을 정하고 대선우(大單于)라 부르며 진나라(晉)의 관작을 받는 반독립적 체제였다. 337년에 아들 모용 황(皝) 시절에 연왕(燕王)이라고 불렀고 단씨(段氏) 선비족을 물리치고 허베이성(河北省) 북부를 지배권에 두었다. 도읍을 용성(龍城)으로 정하고 고구려의 도읍인 환도(丸都)를 함락시켰다. 이후 대를 이어 황제라고 불렀고 도읍을 업(鄴)으로 정했다. 370년에 모용 위(暐) 시절에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에게 멸망당했다.

#전진(前秦, 351년~394년) - 저족(氐族) 출신의 부건(苻健)이 나라를 세웠다. 351년에 저족의 추장 부건(苻健)이 장안(長安)을 도읍으로 정하고 스스로 천왕대선우(天王大單于)라 부르며 국호(나라 이름)를 대진(大秦)이라고 정했다. 제3대 부견(苻堅) 때는 왕맹(王猛)이라는 인재를 두었고 나라가 발전하여 5호 시대 왕조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370년에 전연(前燕)을 멸망시키고 376년에는 전량(前凉)을 병합하고 양쯔강 이북의 땅을 평정하였다. 부견은 화북(華北) 지역이 아직 안정되기 전에 다시 강남의 동진(東晉)을 공격했으나 383년 패수 전투(淝水)에서 크게 지고 멸망하였다.

#후연(後燕, 384년~407년) - 선비족(鮮卑族) 출신의 모용수(慕容垂)가 나라를 세웠다. 전연(前燕)의 유제(幽帝, 慕容暐)의 숙부인 모용수(慕容垂)가 세운 선비족(鮮卑族)의 나라이다. 모용수(世祖, 武成帝)는 384년 연왕(燕王)이라 하고 중산(中山)에 도읍을 정하였다. 전성기에 영토가 중산과 업(鄴)을 중심으로 한 화북평야(華北平野) 일대에서 북으로는 남몽골, 고구려의 국경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북위(北魏)가 국력이 성장할 즈음에 자주 부딪혔고 394년에 북위를 공격하였으나 참합파(參合陂)에서 크게 졌다. 모용수는 분하게 여기며 죽었고 북위군에게 중산이 함락되어 조직 체계가 파괴되고 멸망했다. 이후 후연(後燕)의 제4대 왕 모용희(慕容熙)가 포악하고 가혹한 정치를 하자 풍발(馮跋) 등은 모용희를 살해하고 모용운(慕容雲)을 왕으로 세웠다. 모용운은 고구려 사람 고화(高和)의 손자로 고구려 이름은 고운(高雲)이다. 당시에 광개토대왕은 모용운에 사신을 보내어 동족의 우의를 표하기도 했다. 409년에 모용운이 살해되고 한족(漢人) 출신의 풍발(馮跋)이 왕이 되었다.

#후진(後進, 384년~417년) - 강족(羌族) 출신의 요장(姚萇)이 나라를 세웠다. 5호16국 시대에 티베트계 강족이 세운 나라이다. 국호는 진(進)이다. 제2대 왕으로 등극한 아들 요흥(姚興)은 잔존한 부씨들의 저항을 진압하고 400년에 선비족 걸복씨가 건국한 서진(西秦)을 멸망시키고 403년에 하서 회랑지대에 저족이 세운 후량(後涼)마저 멸망시켜서 화북 서부 관중 지방의 강국이 되었다. 416년에 요흥이 죽은 후 요홍(姚泓)이 왕위에 올랐으나 내부적으로 혼란이 일어났고 이를 기회로 여긴 주변 나라들이 공격하였다. 417년에 동진(東晉)의 유유(劉裕)가 전쟁 기간 중에 장안이 함락되고 멸망하였다.

#서진(西晉, 385년~400년, 409년~431년) - 선비족(鮮卑族) 출신의 걸복국인(乞伏國人)이 나라를 세웠다. 유중지방(楡中地方)에 있던 선비족(鮮卑族)의 추장 걸복국인(乞伏國仁)은 처음에 진나라(秦) 부견(苻堅)의 신하였는데 비수(淝水)의 싸움에서 전진(前秦)의 국력이 약해지자 스스로 대도독대선우령진하이주목(大都督大單于領秦河二州牧)이라고 부르며 연호를 정하고 반독립체제를 형성했다. 걸복건귀(乞伏乾歸) 시절에는 금성(金城, 甘肅省)에 도읍을 정하여 대선우하남왕(大單于河南王)이라 불렀고 저(氐), 강(羌), 선비(鮮卑)와의 전쟁에서 이겼다. 농서(隴西), 파서(巴西) 지역을 점령하였으나 후진(後秦)에게 전쟁에서 졌고 한동안 후진의 신하의 나라가 되겠다고 왕호(王號)를 쓰지 않다가 나중에 후진이 세력이 약해지자 다시 독립하여 진왕(秦王)이라고 불렀다. 걸복치반(乞伏熾磐) 시절에는 토곡혼(吐谷渾)을 물리치고 남량(南凉)을 병합하였고 크게 전성기를 누렸으나 걸복모말(乞伏慕末) 시절에 하나라(夏)에게 멸망당했다.

#후량(後凉, 389년~403년) - 저족(氐族) 출신의 여광(呂光)이 나라를 세웠다. 양(凉)이라고도 부르지만 장궤(張軌)가 세운 양(凉, 前凉)과 구분하여 후량이라고 부른다. 전진(前秦)의 장군으로 서역 원정을 갔던 저족(氐族)의 여광(呂光)은 돌아오는 길에 비수(淝淝水) 전쟁에서 전진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고장(姑臧:甘肅)을 점령하고 386년에 양주목(凉州牧) 주천공(酒泉公)이라고 하여 하서 지방(河西地方)에서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왕이 죽은 이후 정권이 불안정하여 내분이 자주 일어났고 배하(配下)에서 분리한 북량(北凉)과 남량(南凉)의 공격에 막아내지 못하고 403년에 제4대 왕 여융(呂隆)은 후진(後秦)에게 항복하였다.

#남량(南凉, 397년~414년) - 선비족(鮮卑族) 출신의 독발오고(禿髮烏孤)가 나라를 세웠다. 5호16국의 하나이다. 독발오고는 후진(後秦)이 강성해지자 후진의 양주자사(凉州刺史)가 되었고 세력이 약해지자 고장(姑藏)을 도읍으로 하여 다시 독립하였다. 414년에 서진(西秦)에게 멸망당했다.

#남연(南燕, 398년~410년) - 선비족(鮮卑族) 출신의 모용덕(慕容徳)이 나라를 세웠다. 중국 5호 16국 가운데 선비족(鮮卑族)의 모용덕(慕容德)이 398년 무렵에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화현(滑縣)에 세운 나라이다. 조카 모용초(慕容超)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410년에 동진(東晉)의 유유(劉裕)에게 멸망당했다.

#서량(西凉, 400년~421년) - 한족(漢族) 출신의 이고(李暠)가 나라를 세웠다. 왕실은 한족 사람(漢人)인 이씨(李氏) 가문으로 농서(隴西)의 명가로서 대를 이어 군태수(郡太守)를 지냈다. 후량(後凉)의 여광(呂洸)이 말년에 이고(李暠)가 백성들로부터 추대되어 둔황(敦煌) 태수가 되었고 대도독 대장군 양공 진이주목(大都督大將軍凉公秦二州牧)이라고 스스로 불렀다. 그리고 연호를 제정하여 독립체제를 형성하였다. 동방으로 세력을 진출해서 간쑤성(甘肅省) 주취안(酒泉)으로 옮겼으나 독발선비족(禿髮鮮卑族), 저거흉노족(沮渠匈奴族) 등의 압박이 심하여 세력을 확장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417년에 고(暠)가 죽고 그의 아들 음(歆)이 그 뒤를 이었는데 저거몽손(沮渠蒙遜)과 대립하여 죽었고 국토인 주취안을 빼앗겼다. 그의 동생 순(恂)이 대중에게 추대되어 그 뒤를 이어서 둔황 지역을 지켰으나 몽손에게 전쟁에서 자주 패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서량은 421년에 멸망했다.

#북량(北凉, 397년~439년) - 흉노족(匈奴族) 출신의 단업(段業)이 나라를 세웠다. 중국 5호16국 시대에 흉노(匈奴)의 노수호족(盧水胡族) 출신의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지금의 간쑤성(甘肅省) 지역에 세운 나라이다. 국호는 양(凉)이지만, 장궤(張軌)가 세운 전량(前涼)이나 여광(呂光)이 세운 후량(後凉), 이고(李暠)가 세운 서량(西凉), 독발오고(禿髮烏孤)가 세운 남량(南涼) 등과 구분하기 위해 북량(北涼)이라고 부른다. 문왕(文王) 단업(段業, 재위 397년〜401년) 무선왕(武宣王), 저거몽손(沮渠蒙遜, 재위 401년〜433년), 애왕(哀王) 저거목건(沮渠牧犍, 재위 433년〜439년)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서 40년 가까이 나라가 지속되었다. 북량이 유연(柔然)과 연합해서 북위에 맞서려 하자 북위는 439년에 북량을 침략하여 공격했다. 수도인 고장이 북위의 군대에 함락되어 북량은 멸망했고 북위는 화북(華北) 지역의 통일을 이루었다.

#하나라(夏, 407년~431년) - 철불부(鐵弗部) 출신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나라를 세웠다. 혁련발발은 중국 5호16국의 하나인 대하(大夏)라는 나라를 세운 남흉노(南匈奴) 선우(單于)의 자손이다. 407년에 보호해주던 후진(後秦)을 배반하고 독립하여 천왕대선우(天王大單于)가 되었고 나라를 대하(大夏)라고 하였다. 성을 혁련으로 고쳤다. 417년에 동진(東晉)의 유유(劉裕)가 후진을 멸망시켰으나 그가 유유의 유수군(留守軍)을 기습하여 장안(長安)을 점령했고 418년에 황제가 되었다.

#북연(北燕, 407년~436년) - 한족(漢族) 출신의 풍발(馮跋)이 세운 나라이다. 5호 16국의 하나이다. 407년에 후연 모용희의 계속된 폭정에 풍발의 주도로 모반이 일어나서 모용희의 뒤를 이어 고구려 출신의 모용운(慕容雲, 高雲)이 후연의 왕위에 올랐다. 409년에 모용운(慕容雲)이 가까운 신하에게 살해당하자 한족 사람(漢人)인 풍발이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여 북연을 세우고 도읍을 용성(龍城)으로 정했다. 천왕은 거란족(契丹族)을 백성으로 삼아서 농업을 장려하였으나 항상 북위(北魏)로부터 위협을 받았기에 세력이 커지지 못했다. 그의 아우 홍(弘)이 천왕의 자리를 이었고 백성들이 북위로 이주하는 자가 많았다. 홍은 강남의 송나라(宋)와 동맹을 맺고 스스로 번(藩)으로 부르면서 조공(朝貢)을 바치며 송나라로부터 관작(官爵)을 받았는데 당시 중국 강남 지역에서는 이 나라를 황룡국(黃龍國)이라 불렀다. 436년에 북위군에 의해서 수도인 용성이 함락되자 북연왕은 고구려로 도망갔고 436년에 북풍(北豊) 지역에서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하며 멸망했다.

*본인 작성,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NAVER 국어사전, 지식백과 두산백과, 나무위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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