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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촉오 삼국 시대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2. 8. 1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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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영토 지도

삼국지(三國志)는 중국 진나라(晉) 시대에 "진수"가 지은 위나라, 오나라, 촉나라 삼국의 역사 기록이다. 기전체로 위지 30권, 촉지 15권, 오지 20권으로 모두 65권으로 되어 전해진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三國演義)는 14세기에 원나라(元) 시대에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중국의 첫 장편 역사소설이다. 삼국지와 삼국지연의는 서로 내용이 비슷할지 모르나 저자도 다르고 책이 따로 존재한다.

촉나라(蜀)는 촉한(蜀漢)이라고도 부른다. 전한(前漢) 경제(景帝) 황제의 후손으로 현덕(玄德) 유비(劉備)가 촉(蜀, 四川省)에 나라를 세웠다. 정식 명칭은 한나라(漢)이고 계한(季漢)이라고도 부른다. 후한(後漢) 말에 농민군 황건적(黃巾賊)이 반란을 일으켰고 후한의 권위가 무너지자 많은 강한 세력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다. 형주(荊州) 목사 유표(劉表)의 객장(客將)이던 유비는 유표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종(琮)이 조조(曹操)에게 투항하자 제갈량(諸葛亮)의 도움을 받고 오나라의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격파하고 형주의 목사가 되었다. 이리하여 양쯔강(揚子江) 중류 유역을 영토로 삼았다. 익주(益州, 成都) 목사 유장(劉璋)을 공략하여 스스로 익주 목사가 된 뒤 서기 219년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라 불렀다. 다음해 조비(曹丕)가 한제(漢帝)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르자 서기 221년 유비도 또한 제위에 올라 수도를 청두(成都)로 정하고 고조(高祖) 이하의 종묘를 세워 한나라(漢)의 정통성을 내세웠다. 다음해 손권도 연호(年號)를 세웠다. 그러나 형주의 영토 지배권을 둘러싼 촉한과 오나라(吳)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비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백제성(白帝城)에서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후의 일처리를 위임받은 제갈량은 죽은 유비에 이어서 왕이 된 유선(劉禪)을 모시며 오나라와의 국교를 회복하고 내부적으로는 산업을 장려하여 백성들의 힘을 키운 후에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를 토벌하여 새로 얻은 영토를 운영하는 등 국력을 강화하였다. 동시에 중원(中原)을 회복하고자 자주 북벌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기 234년 우장위안(五丈原)에서 전쟁 중에 병에 걸려 죽었다. 그후 장완(蔣琬), 비위(褘), 강유(姜維) 등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해마다 위나라(魏)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환관 황호(黃晧)가 혼자 권세를 쥐고 자기 마음대로 하였기에 국력이 쇠퇴하여 서기 263년 위나라 군대의 공격에 유선이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오나라(吳)는 강동 손씨 정권으로 추존왕은 손책이며 공식적인 초대 건국 군주는 손권이다. 마지막 군주는 장락공 손호이다. 나라 이름인 오(吳)는 서기 198년 손책이 오후(吳侯)로 책봉되었을때 사용되었던 땅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손씨일가의 고향인 오군(吳郡)이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후한 말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군벌 손책이 기반을 닦고 그의 동생 손권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개국 이후 촉한과 전략적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조위와 서진에 대하여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전쟁을 피하고 지키는 이미지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합비전선에서 꾸준히 조위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다. 다만 촉한의 북벌과 마찬가지로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촉한이 멸망한 후 서진이 파촉에서부터 대량의 수군을 조련하여 내려오며 형주, 회남에서도 동시에 공격하자 여러 장수들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하지만 오나라는 패배하고 멸망했다. 위진남북조시대의 다른 명칭인 6조시대는 오나라부터 건업에 차례대로 도읍한 여섯 국가들 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에서 유래하였다. 사마씨 진나라가 6조 중에서 첫번째로 오나라를 멸망시켰고 오나라 유민들은 북방 민족에 의해 남쪽으로 쫓겨와서 오나라의 뒤를 잇는 두번째 남쪽 지방 왕조 정권을 세운다. 중국 역사에서 오(吳)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많기 때문에 동오(東吳), 손(孫)씨 성을 붙여서 손오(孫吳)로도 부르며 남오(南吳)라는 나라도 있다. 수도는 건업(建業)이고 도읍지를 옮기기도 했다. 제2수도급은 무창(武昌), 강릉(江陵), 교지(交趾), 오군(吳郡), 회계, 장사 등이 주요 도시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대만과 하이난 섬도 오나라의 영역이었다. 촉한이나 위와 비교하자면 중앙의 통제력이 낮고 지방 호족 그중에서도 일종의 개발 영주에 속하는 토호들의 힘이 강했다. 이 때문에 손권이 별로 영토 확장을 못했다는 설도 있다.

위나라(魏)는 후한 말기에 혼란한 상황 속에서 황제를 데리고 있던 조조가 기반을 닦고 그의 아들 조비가 선양의 형식으로 즉위하였다. 국호인 위(魏)는 조조가 위공(魏公)에 봉해진 것에서 유래하였다. 구별을 위해 국성을 가져와서 조위(曹魏)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륙에서 "중원"인 화북 지방의 대부분이 위나라의 영토였기에 인구 수와 그에 따른 생산력이 촉한과 손오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조위는 조조가 후한으로부터 위공(魏公)의 봉작을 받으면서 공국(公國)으로 건국되었다. 그리고 서기 216년 조조가 위왕(魏王)의 봉작과 구석을 받으면서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처음부터 조조는 후한의 승상으로서 후한의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왕국을 건국하고 후한과는 완전히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했고 조위가 왕국의 체계를 갖춘 이후 후한은 사실상 형식만 남게 되었다. 조조가 죽은 뒤 조비가 조위의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후한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서 후한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위나라는 황제의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못 가서 조비가 죽은 뒤 조비에 이어 조예가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조진과 조휴 등 황제 일족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으나 조진은 오래지 않아서 죽었고 조휴는 오나라 군대에 크게 져서 분에 못 이겨 죽었다. 조예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조위는 직계 혈통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조예의 양아들 조방이 새로운 황제가 되었기에 그 혈통을 문제를 삼아서 황실의 권위와 정통성이 땅에 떨어졌다. 사마의가 공적을 세워 조위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자 조예는 죽기 직전 조진의 아들인 조상에게 실권을 주어 조씨 황실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고평릉 사변으로 사마의에게 정권을 빼앗겼고 조조와 조비 대의 공신들의 후손들이 사마씨에 세력에 들어갔다. 조위가 망한 후 선양을 받은 사마씨는 이전에 받은 작위에 따라 나라의 이름을 대진(大晉)이라 했는데 오늘날에는 역사 속의 다른 진나라(晉)와 구분하기 위해 서진이라고 부른다. 서진의 황제들은 같은 사마씨 일족에게 힘을 키워주며 삼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후한 시대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였기에 그 이후 왕조는 멸망했다. 수도는 선양 직후에는 후한의 마지막 수도 허(허창)를 그대로 썼으나 곧 낙양으로 천도했다. 후한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둔전제와 세병제가 실시되었다. 조조의 강병 정책이 성과를 거두어 위나라는 매우 강력한 군대를 가졌다. 요동 지역에 공손씨 세력이 있었을 때 고구려와 위나라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다. 오나라 사신이 고구려에 왔을 때 동천왕은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냈고 위나라가 공손연을 공격할때 고구려도 일천명의 병력을 보내어 도왔다. 그러나 공손연 세력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고구려가 서로 국경이 접하게 되자 상황이 급변하여 위나라와 고구려는 급격히 사이가 나빠졌다. 그리고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본인 작성, NAVER 국어사전, 지식백과 두산백과, 나무위키, 홍루몽 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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