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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여진족 외교 관계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2. 9. 17.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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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은 여진족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우선 여진족(女眞族)은 여직(女直)이라고도 불렀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이라고 불렀고 한나라(漢) 시절에는 읍루(挹婁)라고 불렀다.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이라고 불렀고 수나라(隋), 당나라(唐) 시절에는 말갈(靺鞨)이라고 불렀다. 10세기 초의 송나라 시절에 처음으로 여진(女眞)이라 불렀고 명나라 시절에도 여진이라고 불렀으나 청나라 시절에는 만주족(滿洲族)이라고 불렀다. 지리적 위치상 가까이에 있던 한민족과는 관계가 깊을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가 강성했던 시절에는 여진족을 말갈족이라고 불렀다. 말갈족의 여러 부족 중에는 속말말갈(粟末靺鞨)과 백산말갈(白山靺鞨)이 있는데 이들이 고구려의 지배권 안에 있었다. 고구려가 나당군(羅唐軍)에게 멸망을 당한 이후에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고구려 부흥운동에는 말갈족이 도왔고 당나라(唐)와 맞서 싸우며 발해(渤海, 振國)를 건국했다. 발해 사회에서 말갈족은 고구려 유민들의 지배를 받던 피지배층에 속하게 되었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契丹)의 지배권에 들어가며 여진(女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거란족은 부족을 통합하여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요나라(遼)를 세웠고 발해를 멸망시키는데에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다. 942년에 거란족은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高麗)와 이웃 나라로서 화친(和親)을 맺기 위해서 사신을 고려에 보냈다. 그리고 낙타 50마리를 선물로 보냈는데 당시 고려는 같은 동족인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를 원수처럼 여겼기에 화친을 거절했고 선물로 받은 낙타 50마리는 만부교 다리 밑에 두고 굶겨서 죽였다. 이 사건을 만부교 사건(萬夫橋事件)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요나라와 고려의 사이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고려는 건국한지 얼마되지 않은 신생국이었기에 나라 안과 밖의 외교관계에 있어서 국제 정세에 바라보는 시각이 어두웠다. 요나라와 적대 관계에 놓였으니 훗날에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여진족과 고려와의 관계는 비교적으로 서로 우호적인 관계였던것으로 보인다. 여진족 중에서도 고려와 관계를 가진 것은 고려의 북서부에 있던 압록강 유역에 살던 서여진(西蕃)과 동북 지역의 함경도 지방 일대에 살던 동여진(東蕃)이었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王建)이 북방 개척 정책을 펴면서 여진족과 외교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숙종(肅宗) 재위 기간에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完顔部) 추장 영가(盈歌)가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통합하였다. 1104년(숙종 9년)에 영가의 뒤를 이은 조카 우야슈(烏雅束)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고려군과 마찰이 일어났다. 고려에서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보내어 우야슈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실패했고 다시 추밀원사 윤관(尹瓘)을 보내어 조약을 맺고 상황을 안정시켰다.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1115년에 국호를 금나라(金)라고 하고 1117년에 고려에게 외교 관계를 맺자고 압박했다. 금나라가 1125년에 요나라(遼)를 멸망시킨 뒤에는 고려에게 임금과 신하 사이의 군신 관계를 맺자고 압박했다. 1234년에는 금나라가 몽고에 멸망을 당하자 여진족들은 만주 지방에서 부족 단위로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굳게 지켰다. 원나라(元)에서 명나라(明)로 이어지는 과도기에도 여진족은 압록강 두만강 지역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켜서 고려와 자주 부딫혔다. 고려시대 말기에는 여진족 출신의 이지란(李之蘭)과 이화상(李和尙)이라는 인물이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하였다. 1406년(태종 6년)에 여진족과 조공무역(朝貢貿易) 및 국경무역을 허용하고 조선의 수도 한양(漢陽)에서 여진족을 사신(使臣)으로 접대하는 북평관(北平館)을 설치했다. 그리고 조선의 세력권에 들어가지 않은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였다. 조선시대 세종(世宗)은 김종서(金宗瑞)를 앞세워서 4군(郡) 6진(鎭)을 개척하여 압록강에서 두만강 지역을 경계로 영토를 넓혔다. 세조(世祖) 시절에는 남이(南怡), 어유소(魚有沼) 등을 압록강 지역에 보내서 여진족을 토벌하였고 신숙주(申叔舟)를 회령(會寧) 지역으로 보내서 여진족을 쫒아내어 몰아내며 모련위(毛憐衛) 여진족의 활동 지역도 토벌하였다. 1479년(성종 10년)에는 서북 지역 방면에 있던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이 침입을 하자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을 보내어 물리쳤고 1491년에는 동북 방면의 여진족 추장 우디거(兀狄哈) 부족이 회령의 조산보(造山堡)에 침입하여 도원수 허종(許琮)이 이를 물리쳤다. 그 뒤 명나라의 세력이 약해지자 1616년(광해군 8년)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가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1627년(인조 5년)에 조선을 공격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켰다. 정묘호란은 광해군 시절에는 외교적으로 여진족과 부딫침이 비교적 적었으나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가 금나라를 배척하는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펴면서 명나라(明) 군대를 도왔기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후금(後金)은 나라 이름을 고쳐서 청나라(淸)라고 불렀다. 정묘호란에 이어서 청나라는 1636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켜서 조선을 침입하고 약탈했다. 정묘호란을 겪은 이후 여진족의 무리한 요구에 조선의 신하들 사이에서 여진족의 공격에 대항하여 싸우자는 의견이 높아졌고 조선은 여진족의 공격에 항전했지만 군사 전력에 있어서 조선군은 크게 밀렸다.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고 굳게 맞서 싸웠지만 조선은 패배했다. 그리고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는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었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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