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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조선 倭대마도 정벌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3. 2. 2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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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토에서 일본 대마도(쓰시마섬) 바다 조선군 이동 지도
일본 대마도(쓰시마섬)에서 조선군 이동 지도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조선시대 제4대 국왕(國王)이다. 세종대왕은 왜구의 본거지였던 대마도(對馬島, 쓰시마 섬)를 정벌(征伐)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경제적으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생활 환경이 어렵고 일본 주민들이 먹고 살아가는것이 큰 문제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일본의 영향권에 있는 영토였던 대마도에서 왜적(倭敵)이 명나라(明)에 도적질을 하러 가는 도중 조선의 연안을 침범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해동정(己亥東征)이 결행되었다. 기해동정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기 1419년 조선시대 세종 1년에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 유정현을 삼군 도통사로 임명하여 왜구(倭寇, 일본 해적)의 근거지였던 대마도를 정복한 사건이다. 조선시대 태종은 재위 18년 만에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군무(軍務, 군사 통치권)만은 계속 자신이 가지고 있었으며 기해동정도 태종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기해동정의 직접적인 원인은 1419년 5월 5일에 왜선(왜의 선박) 39척이 명나라에 가던 도중에 비인현(庇仁縣) 도두음곶(都豆音串 , 충청도 서천군 동면 도둔리) 지역을 침략하고 약탈을 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조선군(朝鮮軍)은 병선(兵船, 군선) 7척을 잃었고 도두음곶 만호 김성길(金成吉)과 그의 아들 그리고 아군이 대부분 전사했다. 1419년 5월 12일에는 왜선 7척이 황해도 해주(海州) 지역에 나타나서 약탈을 했고 1419년 5월 13일에는 황해도조전절제사 이사검(李思儉) 등이 병선 5척으로 왜구를 토벌하러 갔다가 해주 연평곶(延平串) 지역에서 적선(賊船) 38척에 둘러쌓여 식량을 요구받는 등 대규모로 왜구가 해안 지역 연안을 침입하였다. 이에 태종은 대신회의를 열고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였다.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임명해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禹博), 이숙무(李叔畝), 황상(黃象)을 중군절제사로 유습(柳濕)을 좌군도절제사로 박초(朴礎), 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로 김을화(金乙和), 이순몽(李順蒙)을 우군절제사로 삼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도 병선 2백척과 기선군정(騎船軍丁, 水軍, 수군)을 거느리고 왜구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1419년 6월 8일에 각 도의 병선을 견내량(見乃梁)에 모이도록 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3군도통사로 삼아 경상도에 가서 이를 총감독하게 하였다. 대마도 정벌에 앞서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왜인(倭人)에 대해서도 분위기 사정을 살폈다. 대마도주의 사신을 함길도(咸吉道)로 보내고 왜인 21명의 사살했으며 경상도에 거주하던 왜인 591명을 경상도에 355명, 충청도에 203명, 강원도에 33명을 나누어 이주(移住)시켰다. 당시에 왜인들이 죽은 자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가 136명이나 되었다. 그 다음에 이종무는 9군 절제사를 거느리고 대마도로 향했다. 조선에서 보낸 병선은 모두 227척이며 군사는 1만 7285명이었고 65일간 버틸 수 있는 군량(軍粮)을 준비하였다. 정벌군은 1419년 6월 19일 주원방포 항구를 출발하여 1419년 6월 20일에 먼저 10여 척이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이종무는 지문(池門, 望沙門 , 태조 때 항복해 귀화한 자)을 시켜 대마도주 소에게 글을 보내어 항복을 권했으나 대답이 없었고 정벌군은 길을 나누어 수색하였다. 그 결과 적병(敵兵) 114명을 죽였고 21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1939호의 가옥(家屋)을 불태웠다. 그리고 129척의 선박을 빼앗았으며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배 20척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버렸다. 잡혀있던 131명의 중국인을 찾아내어 구출하기도 했다. 이종무는 적이 주로 다니는 중요한 지점에 책(柵)을 세워 오래 머무를 뜻을 보여주고 1419년 6월 29일에 두지포(豆知浦)를 수색하여 가옥 68호와 선박 1척을 불태우고 적병 9명을 죽였다. 그리고 중국인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했다. 이로군(尼老郡)에서 좌우군을 이끌고 수색하던 좌군절제사 박실이 복병을 만나 편장 박홍신(朴弘信), 김해(金該) 등 조선의 장수와 군사가 100명 가까이 전사하였다. 일본의 역사서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에는 당시에 조선군이 왜군을 1500명 죽이고 배를 불태웠다는데 이는 과장된 말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박실의 패전(敗戰)에다가 대마도주 소는 조선군이 오래 머무를까 걱정하고 근심하였다. 조선군은 1419년 7월 3일에 거제도로 군사를 거두었다. 동정(東征) 이후 대규모의 왜구가 없어지고 평화적인 인적 이동이 이루어졌다. 기해동정은 왜구에 대한 조선의 영리하고 빠른 대처가 결과적으로 목표를 이루고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419년 7월 3일에 왜구가 다시 침략하였기에 다시 정벌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전쟁을 중단하기로 했다. 대마도주는 1420년 정월 지오(時應界都)를 보내어 항복의 뜻을 전해왔다가 뒤에 다시 입장을 바꾸었기에 1420년 11월에 왜구가 항복하지 않으면 다시 조선이 군대를 보내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왜인들이 조선에 귀순(歸順)하도록 하는것이 목적이었기에 실행되지 않았다. 1421년 4월에 대마도주가 통상을 허락해 주도록 요청하자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왜구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대마도를 비롯한 서부 일본 각 지역의 주민들이 조선과 서로 평화롭게 지내게 되었다.
 
*본인 작성, NAVER 한글글꼴용어사전,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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