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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신라시대 살았던 동물 사건

    2024.12.24 by 느낌 .

  • 승리자가 역사를 기록한 반란

    2024.02.18 by 느낌 .

  • 처음 굳센 의지 무너진 반란

    2024.01.24 by 느낌 .

  • 역모 모함 음모 모략의 반란

    2024.01.05 by 느낌 .

  • 위화도회군 그리고 개경 전투

    2024.01.02 by 느낌 .

  • 황건적黃巾賊홍건적紅巾賊

    2023.11.14 by 느낌 .

  • 왕실 왕위 계승 찬탈 반란5

    2023.10.17 by 느낌 .

  • 멸망 위기의 나라 백성 반란

    2023.07.29 by 느낌 .

  • 선비족 핏줄 탁발씨 우문씨

    2023.04.16 by 느낌 .

  • 고구려 백제 려제동맹

    2022.09.16 by 느낌 .

  • 종교 이념 사상 대립 반란

    2022.08.18 by 느낌 .

  • 신라왕 우리 고유 방식 이름

    2022.08.17 by 느낌 .

  • 중국 선비족 모용씨-갈족 석씨

    2022.08.09 by 느낌 .

  • 조선 영조 당쟁 탕평 정치

    2022.07.29 by 느낌 .

  • 춘추필법 식민사관 해석

    2022.07.25 by 느낌 .

  • 신라 성골 진골 골품 제도

    2022.07.18 by 느낌 .

신라시대 살았던 동물 사건

고려시대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신라 본기에 나오는 지금은 오늘날에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진귀한 동물과 관련된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기원전 57년(BC 57년, 예수 그리스도 탄생 57년전) 박혁거세가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에 즉위하였다. 국호는 "서라벌"이었다. 그 이전에 한반도 북쪽에서 내려온 고조선 유민들이 6명의 촌장이 되어 여섯 부락을 이루어서 살게 되었다. 진한(辰韓) 6부이다. 어느날 여섯 촌장이 들판에 모여 있었는데 고허촌장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우물가 나정 옆 숲속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가보니 말은 없고 큰 알이 있었다. 그 알에서 어린 아이가 낳았다. 혁거세거서간 5년 봄 정월에 용(龍)이 우물가 알영정에 나타났는데 오른쪽 옆구리에서..

남북국시대 신라-발해시대 2024. 12. 24. 06:40

승리자가 역사를 기록한 반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우며 성장하는 동안에 특히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국사(國史) 과목은 시대가 지나고 변화해도 커다란 논란거리를 낳았다. 국사는 단 하나의 과목이 아닐 만큼 수 많은 학문 공부와 연관성이 있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당장에 넓게는 세계사 과목에 연대하고 국어 문학 과목에 실려 있는 언어, 문자, 옛 문학 논설부터 시작해서 정치, 외교, 국방, 법학, 도덕 이념, 종교, 사회, 문화 과목 내용과 산수 수학, 의학, 자연 과학, 농업, 어업, 기술 산업, 부동산 상업 거래, 금융업, 토목 건설, 건축, 식품, 유통, 물류, 교통, 관광업, 방송 통신, 출판 인쇄, 스포츠 체육, 음악, 미술, 예술 과목 등의 전방위적인 문화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머나먼 불을 발견한 선사시대의 과거부..

다양한 해석과 탐구 평가 2024. 2. 18. 12:12

처음 굳센 의지 무너진 반란

중앙 정부 조정에 폭정에 대해서 불만을 품은 백성들은 지금의 나라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마음대로 바꾸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신들의 근거지를 거점으로 삼아서 반란을 일으켰다. 인근의 멀고 가까운 지역의 백성들도 합세를 하여 하나로 힘을 보태었다. 반란군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고 그 영향력도 급속도로 널리 퍼져갔다. 그러자 처음에는 그 반란의 세력을 안일하게 가볍게 보고 있다가 중앙 정부 조정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토벌군을 조직하여 보내서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도 조정에서 토벌군을 보낼 것이라고 어느 정도 짐작은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군대를 편성하여 방어진을 짜고 자신들의 근거지의 성곽을 지키는 수성전에 대비하고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란군이 장악한 성의 진지에 도착..

다양한 해석과 탐구 평가 2024. 1. 24. 09:50

역모 모함 음모 모략의 반란

시대별로 반란은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기존의 왕을 몰아내고 자신의 세력에 이익이 되는 왕을 세우기 위해서 신하들은 역모를 계획하였다. 우선 왕을 중심으로 충성하며 따르는 반대파 세력의 신하들부터 제거해야 했다. 그래서 왕에게 반대파 세력이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대규모로 군사를 키우고 세력을 넓혀서 장차 왕권을 위협하고 반역을 꾸미고 있다고 상소문을 올리며 모함을 했다. 그래서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아무리 임금이 어진 정치를 펴고 부모처럼 백성을 보살피는 성군으로서 살아가고자 해도 왕은 자신의 왕권에 도전을 하는 신하는 절대로 용서를 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래서 왕은 이성을 잃었고 주위 신하들을 의심하며 분노했다. 신하가 왕권에 도전을 하면은 어떻게 되는지 엄한 처벌을 내리며..

다양한 해석과 탐구 평가 2024. 1. 5. 11:53

위화도회군 그리고 개경 전투

위화도(威化島)는 의주 지역의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이다. 당시 고려와 명나라(중국)의 관계는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 매우 긴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1388년에는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고려의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도사(遼東都司)의 관할 아래 두겠다고 알렸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 큰 반발이 일어났고 요동정벌 전쟁으로 이어졌다. 요동정벌이 단행되었을 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일은 옳지 않고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일본 해적)가 창궐할 것이며 매우 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4가지 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며 반대..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2024. 1. 2. 05:48

황건적黃巾賊홍건적紅巾賊

황건적(黃巾賊) - 황제와 맺어진 사적인 관계를 이용해서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황제의 권력을 차지하려는 왕의 외척 세력과 환관(내시)들이 기회를 보았다. 그리고 후한(後漢)의 황제는 대부분 나이가 수명이 짧아서 일찍 죽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농민들이 고통을 당했다. 그러자 대규모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황건적의 난"으로 약 30년 간 전쟁이 이어졌다. 후한은 중국사에서도 외척과 환관의 횡포와 비리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시대였다. 이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오랜 기간 황제는 그들의 꼭두각시 정도의 존재였다. 환관 제도는 중국, 우리나라, 베트남 그리고 고대 이집트나 페르시아, 그리스, 동로마(東Roma) 등의 나라에서도 시행되었다. 전제군주에 봉사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이고 거세를 하고 후궁이 많은 ..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2023. 11. 14. 11:30

왕실 왕위 계승 찬탈 반란5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각종 사치와 향락에 빠져서 살아간다면은 왕을 따르던 신하들은 등을 돌리고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더욱이 왕은 수시로 거처인 왕궁을 비우고 산과 들로 짐승 사냥이나 하려고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다. 나라가 기상 이변으로 비가 많이 내려서 홍수가 나고 논과 밭이 그리고 집이 물에 잠기고 떠내려가고 산사태가 일어나서 사람이 많이 죽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는 일도 있었다. 비가 적당히 내리지 않아서 한 해 농사를 망치고 곡식 수확량이 줄어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서로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벌어져도 백성들의 생계 유지는 걱정하지 않고 가혹하게 조세를 요구하고 거두자 백성들은 왕을 원망하며 원성의 비난이 커졌고 왕에게 큰 불만을 가지고 있던 신하..

다양한 해석과 탐구 평가 2023. 10. 17. 11:25

멸망 위기의 나라 백성 반란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존재한다. 하지만 나라가 없으면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터전이 사라지기에 나라가 존재해야 백성도 있는 법이다. 나라가 안정이 되어야 백성이 편안하게 생업을 이어갈 수 있다. 지배 세력이 일반 백성들을 고되게 대하면은 백성들 사이에서 불만이 생기고 화를 부르게 된다. 백성들이 무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은 크게 2가지 경우이다. 앞서 말한대로 첫번째는 지배 세력의 일반 백성들을 무리하게 요구하며 이용만 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나라 밖의 외적이 국내에 침략해서 국가 안위가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이다. 나라가 멸망하게 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은 조정 수뇌부 직속 관군만으로는 외적을 막긱 쉽지가 않았다. 현대전에서는 학도병과 예비군이 뽑혀서 정규군과 함께 구..

다양한 해석과 탐구 평가 2023. 7. 29. 05:50

선비족 핏줄 탁발씨 우문씨

선비족 탁발씨 (鮮卑族 拓跋氏) - 몽골에서 화북(華北) 지방으로 들어왔다. 선비족의 하나로 옛 투르크어 언어를 사용하였다. 북위의 효문제(孝文帝)는 "흙(土)는 만물의 근원"이라는 사상에 입각하여 탁발씨를 중국식으로 성을 원씨(元氏)로 고쳤지만 북주 시대(北周時代)에는 옛성(姓)으로 되돌아갔다. 수나라 때에는 토욕혼(吐谷渾)의 유력한 왕족 중에 탁발씨가 있었고 당나라 때에는 탕구트에 탁발씨가 있었으며 송나라 때는 서하(西夏)의 왕가(王家, 왕실)도 처음에는 탁발씨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탁발씨는 선비족(鮮卑族)의 한 부족이다. 탁발이란 복성(複姓)을 사용했으며 2~3세기에 중국 산서성 북방 지역에 자리잡고 살다가 4세기 말경에 중국 대륙을 침입하여 북위(北魏)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탁발씨는 중화권의 ..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2023. 4. 16. 10:44

고구려 백제 려제동맹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부여족(夫餘族)이다. 부여의 같은 핏줄이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는 예맥족(濊貊族)이다. 부여라는 나라에서 갈라져 나와서 각자 나라를 세웠다. 주몽(高住蒙)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고 훗날 남쪽으로 내려와서 졸본 부여에 고구려를 세웠다. 온조(溫祚)는 주몽의 왕비였던 소서노(召西奴)와 함께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서 백제를 세웠다.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한핏줄이다. 하지만 두 나라는 서로 창과 칼을 들고 맞서며 싸우던 서로 다른 제도와 풍습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서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체제의 독립국이었다. 고구려, 신라(新羅), 백제, 가야(伽倻)는 서로 외적의 침입을 막거나 적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서 필요할 때마다 수 없이 서로 군사 동맹 조약을 맺었고..

고대시대 백제-고구려시대 2022. 9. 16. 16:03

종교 이념 사상 대립 반란

종교와 관련된 사건의 반란도 백성들에게는 가장 비극적이고 치열한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종교는 과거나 현재나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사이다. 사람들은 믿는 종교에 따라서 세력이 나누어졌고 생활 양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크게 보면은 종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지배한다. 인류가 처음부터 믿어왔던 민간 신앙을 시작으로 불교, 기독교(개신교), 천주교(카톨릭교)는 모두 2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종교는 과거에 오랜 세월 동안 전쟁의 불씨가 되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각자가 믿는 종교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다가 죽었다. 자신들이 믿는 종교에 대한 저마다의 옳고 그름에 대한 정당성과 절대적인 결연한 의지가 도를 지나쳐서 과격한 광신도를 낳기도 하였다.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과도하게 ..

다양한 해석과 탐구 평가 2022. 8. 18. 13:37

신라왕 우리 고유 방식 이름

옛 조선 고조선(古朝鮮)의 유민들이 북쪽에서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내려와서 정착하여 진한(辰韓) 6부를 형성했다. 그리고 후손들이 이후에 신라를 건국했다. 기원전 57년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왕위에 올랐다. 혁거세를 거서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제2대에 남해가 왕위에 올랐고 차차웅이라고 불렀다. 제3대 유리부터 제18대 실성까지 니사금이라고 불렀고 제19대 눌지부터 제22대 지증까지는 마립간이라고 불렀다. 제23대부터 정식으로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신라왕을 이름 부르게 되었다. 거서간(居西干)은 시조 박혁거세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에는 거서간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을 뜻하고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칭호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거슬한이라고도 하였다(位號曰居瑟邯). 처음 입을 열..

남북국시대 신라-발해시대 2022. 8. 17. 08:50

중국 선비족 모용씨-갈족 석씨

모용씨(慕容氏)는 고대시대 선비족(鮮卑族)의 하나이다. 중국 대륙의 요서 지방에서 살다가 서기 3세기경부터 중국 동북부 지역으로 옮겨 가서 전연(前燕)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전연이 망하자 후연(後燕)이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후연이 망하자 서연(西燕), 남연(南燕)이라는 나라가 차례대로 건국했다. 모용씨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중국 내륙에 자주 침입을 했고 이후에 흉노(匈奴)에게 멸망을 당한 동호(東胡)의 후예라는 설이 있는데 분명하지는 않다. 선비족이 역사 기록에 나온 것은 흉노의 피지배 종족으로 1세기 초부터이고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1세기 말에 북흉노가 후한(後漢)의 공격을 받고 세력이 약해지자 선비족은 흉노에 이어서 몽골 지역에서 번영하였다. 2세기 중엽에 단..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2022. 8. 9. 15:12

조선 영조 당쟁 탕평 정치

조선시대 사도 세자의 아버지는 영조 대왕이고 정조 대왕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선(愃)이다. 자는 윤관(允寬)이고 호는 의재(毅齋)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와 갈등과 대립을 했고 사도세자는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어 서인으로 신분이 강등되었다. 그리고 영조의 어명으로 곡식 저장 뒤주 속에 갇혀서 굶어 죽었다. 이후 영조가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내린 시호가 "사도"(思悼)이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다시 "장헌 세자"(莊獻世子)라고 시호를 바꾸었다. 영조(英祖)는 조선 제21대 왕(1694년~1776년)으로 이름은 금(昑)이고 자는 광숙(光叔)이며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탕평책(蕩平策)을 쓰면서 당쟁을 조화롭게 하려고 힘썼고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했으며 ..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2022. 7. 29. 10:18

춘추필법 식민사관 해석

오래전에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중국 사대주의 유학자와 진취적인 진보 성향의 이상주의자로 갈라져 있었다. 우리 한민족이 중국 세력과 대립하며 영토 확장 정책을 벌였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나라를 지키고 높이 뻗어나가겠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저 멀리 넓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삼국 시대를 거쳐서 태조 왕건이 나라를 "고려"라는 이름으로 통일한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는 쇠락해지고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가 지배층에게 널리 퍼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중국 중심의 문화권인 중화 사상과 사대주의가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렸다. 고려시대의"김부식"(金富軾)은 역사서를 쓰는데 있어서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사학자이다. 그래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과거의 우..

다양한 해석과 탐구 평가 2022. 7. 25. 09:05

신라 성골 진골 골품 제도

신라시대에는 왕이 될 수 있는 계급 신분이 따로 있었다. 신라의 귀족 지배 계급은 "성골"과 "진골" 핏줄 계급 가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골품 제도라고 부른다. 성골 계급은 신라 왕실에서 왕이 될 수 있는 핏줄의 가문이었고 진골 계급은 귀족 가문의 지배 계층이었지만 신라의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성골은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 모두가 왕족인 신분이었고 진골은 아버지와 어머니 둘 중에 한사람만 왕족인 성골 신분이거나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진골 출신인 경우였다. 신라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 자주 근친혼이 이루어졌다. 근친혼이라는것은 쉽게 말해서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끼리도 서로 결혼을 하는 제도인데 이렇게 근친혼을 했던 이유는 혈연으로서 더욱 단단한 내부 결속과 단합을 하기 위함이고 왕실의 후일에 자..

남북국시대 신라-발해시대 2022. 7. 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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